공직선거법 제82조6에 의하면, 선거시기에 실명확인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인터넷 언론사에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그러나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는 국가가 인터넷 언론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검열이자, 익명성에 바탕한 표현의 자유와 여론 형성의 권리를 침해합니다. 정보인권 단체로서 진보넷은 선거시기에도 네티즌이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할 수 있도록, 실명제를 거부한 인터넷언론의 기사들을 미러링하고 그에 대한 덧글란을 선거기간 동안 운영합니다. 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
공부는 한자로 工夫, 功夫라고 쓴다. 우리나라에서는 工夫라고 주로 쓰며 불교 용어에서 유래하였다. 곧 한마음으로 불도수행에 정진하는 것이란 의미다.(한국어원학회(http://www.etymon.kr/)에서) 이것이 조선에서 주자학의 영향으로 학문을 공부하는 현재의 의미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쿵후”라는 무술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쿵푸(工夫)의 기원을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로 보기도 하니 공부란 원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수련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었으리라.
한동안 나에게 공부란 책을 읽는 것이었고 세계와 나를 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머리로 하는 공부는 아무리 할수록 답이 없었다. 모든 이론들은 이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쪽이 맞고 저쪽이야기를 들어보면 저쪽이 맞는 것 같다. 진리란 원래 스스로를 진리라 선언하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하지 않았던가?
진리를 실천으로 증명한다는 말을 믿고 열심히 실천하는 삶을 목표로 삶을 실천했으나(삶의 실천이니 그냥 살았다 인가?) 그 실천이 내게 증명해준 것은 그 말조차 항상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실천으로 증명한다며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은 무조건 옳다는 아집의 근거로 쓰이는 일은 얼마나 많으며 조직의 실천이 개인의 올바른 자유를 억압하는 경우는 또한 얼마나 많았는지.
이렇게 공부에 지치고 실천의 의지는 무디어 질 무렵 나는 우연히 불교를 ‘학습’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 여러 인연에 따라 담배를 끊고 살을 빼게 되었다. 몸과 마음으로 자신을 수련하는 진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스트레스 가득한 세상에서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이야기나 식탐을 줄이라는 당위는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지금 보다 더 낫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과정이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확신한다. 한번 해보고 재미있으면 계속 해보는 놀이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용해 부딪혀보자. 그때 놀이라 불리던 공부라 불리던 삶은 변화한다. 어차피 공부나 놀이나 끝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미디어 충청의 지면을 통해서 내가 겪은 몸과 마음의 공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남을 공부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공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니 독자 여러분이 나의 공부를 점검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면 함께 진정한 공부를 하여보자.
작년 여름에 담배를 끊은 이후 부쩍 늘어난 몸무게는 어느덧 107킬로 그램에 육박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단 한번도 작년에 비해 몸무게가 줄은 해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살을 빼라는 사람들의 권유 혹은 비만인 들을 향한 사람들의 공격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한번은 살을 쫌 빼라는 한 후배의 애정 어린 충고에 심술이 잔뜩 나 있는 채로 세상에는 살을 빼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이 많다고 살을 뺄 노력이라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겠다고 어깃장을 부린 적 도 있었다. 사실 살을 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주위를 둘러보라. 마른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는 통통한 것이 부럽다고 살을 찌는 법을 알려달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체질적으로 살이 안 찌는 사람 살찌우는 게 살 빼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거의 답이 없다. 그리고 다시 눈을 더 밖으로 돌려보자. 북한의 기아 어린이들의 사진을 볼 때마다, 아프리카의 아사자들을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살을 빼기 위해 헬스장에 다니는 우리의 노력이 부끄러워진다.
그러나 살찐 자들이여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자. 비만은 당신만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의 죄가 있다면 욕망대로 참지 않고 살았을 뿐이다. 자본주의 전 세대의 과거는 식량의 절대 부족 상태였고 사람들의 미덕은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는 거였다. 오죽하면 우리의 인사는 ‘밥은 먹었냐’ 이겠는가? 민중에게 음식에 대한 욕망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본능 같은 것이었고 비만은 지배계급과 소수 도시인들의 문제였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 식욕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자본주의 제1세계와 개발도상국에서 음식은 시장에서 충분히 공급된다. 약간의 돈만 있다면 말이다. 거기다 단순히 충분히 공급되는 것뿐만 아니라 음식의 소비는 찬양의 대상이 된다. 음식을 먹고 소비하는 것은 중요한 산업적 영역으로 식량회사 제과회사 식육회사 각종 외식산업 업체 등 식생활 관련 자본은 중요한 산업적 부분이다. 그리고 광고에 있어서 이들의 영역은 더더욱 대단해서 이들이 만들어 내는 음식의 환상은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
이제 식욕은 미덕이 되고 더 맛있는 것을 추구하는 식도락은 일부 계급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욕망이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 번도 자신의 먹는 욕망을 스스로는 제어할 필요가 없었던 과거에서 식욕을 찬양하는 사회로의 변화를 따라왔을 뿐이다. 제3세계의 현실 따위는 잊어라. 기아다큐멘터리와 대형 프랜차이즈의 고지방 고열량의 음식광고와 웰빙과 로하스란 단어가 유행하는 세계에서도 더 맛있는 음식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다. 신성한 음식에 죄책감이라니, 오직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카운터의 기부 저금통에 넣을 수 있는 약간의 동전일 뿐이다. (나눔은 소중한 것이다. 죄책감은 가지지 마라. 이런 복잡한 생각이 들 때면 스트레스가 생긴다. 무엇인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