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선거법 제82조6에 의하면, 선거시기에 실명확인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인터넷 언론사에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그러나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는 국가가 인터넷 언론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검열이자, 익명성에 바탕한 표현의 자유와 여론 형성의 권리를 침해합니다. 정보인권 단체로서 진보넷은 선거시기에도 네티즌이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할 수 있도록, 실명제를 거부한 인터넷언론의 기사들을 미러링하고 그에 대한 덧글란을 선거기간 동안 운영합니다. 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
요즘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의제는 단연 새 정부의 획기적인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이다. 국민들의 거센 반발로 영어 이외의 교과에 대한 영어몰입교육 방안은 철회되었지만, 초중고 교육과정 개편과 초등학교 영어교육 확대, 영어능력평가시험 도입 등 영어공교육 로드맵은 그대로 강행될 것으로 보여 국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배 계급의 오래된 영어 숭배
사실 이런 사회적 논란과 정책 강행의 모습은 이미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있었다. 1995년에 김영삼 정부는 초등학교 영어 공교육으로 영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현실적 결과는 영어문제는 해결 못한 채, 4조 이상의 영어 사교육 시장만 확장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영어 사교육 시장은 현재 약 15조 규모라고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새 정부의 영어 교육정책에 대한 국민의 찬성률이 더 높은 것은, 영어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인수위의 기본 전제를 인정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제는, 인수위가 내놓은 해법으로 영어교육이 제대로 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가령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오렌지 파동을 보자. 지난달 30일, '영어 공교육 완성을 위한 실천방안 공청회'에서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오렌지를 영어권 사람들의 실제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기 위해 오뤤지 혹은 오린지 등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영어는 발음이 좋아야 잘 한다"라는 통념이 반영된 셈이다. 이런 통념을 굳게 믿는 일부 부모들은 아이의 혀 근육 수술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어와 영어는 발음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미국 사람들 귀에는 "오렌지"나 "오뤤지"나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영어 발음과 관련해 김영삼 전 대통령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는 ‘세계로, 미래로’를 내세우며 영어교육 강화에 앞장섰는데, 정작 자신의 영어 청취력은 상당히 부족했던 듯하다. 92년 대통령 후보시절, 그는 쌀 개방을 우려하는 농민들에게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고 공약했으나, 1년 만에 그 공약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 사과했다. 이렇게 쌀 개방이 사실화 되면서 한미 정상회담 밀약설이 떠돌기 시작했다. 당시 주된 의제는 북한 핵문제였으나, 우르과이 라운드 협상을 앞둔 클린턴 대통령이 회담 말미에 슬쩍 쌀 얘기를 꺼냈단다. 그런데 rice를 nice로 잘못 들은 김 대통령은 회담이 잘 됐다는 만족의 표현인 줄 알고, 크게 ‘오케이’ 했다나. 물론 이건 과장된 이야기이겠지만, 영어 본토 발음에 대한 우리의 열등의식을 보여주는 예는 될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easy man' 논란 또한 그렇다. 후보 시절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고 큰 소리 치던 그는, 정작 백악관 회담 후 부시가 무척 우호적이었다며 상기된 표정으로 부시가 노무현 대통령을 가리켜 ‘easy man'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영어표현에 비교적 자유로운 리영희 교수는 이에 대해 시골사람이 서울에 와서 겪는 문화충격에 빗대면서 “부시가 일방적으로 얘기를 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asy man talk with 라고 하면 ‘더불어 얘기 나누기 편했다’는 뜻이지만, 부시 대통령이 이야기 한 ‘easy man talk to’는 일방적인 것이다. 좀 과장하면 부시가 지시를 내리고 강요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잘 받아주더라’ ‘고분고분하더라’는 뜻이므로 굉장한 차이가 있다.”
국내 최초의 영어 통역관이었던 윤치호는 서구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영어를 배웠다. 그는 근대인이 되고자 무려 60년을 영어로 일기를 썼다. 하지만 서구인의 비서구인에 대한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을 깨닫고 나서는 급기야 친일파로 변신한다. 근대화 논리에 몰입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제국주의의 식민논리에 동화된 것이다. 지배자에 대한 모방이 결국 지배자를 닮아가게 한 것이다.
영어 앞에만 서면 이렇듯 작아지는 우리나라의 지식인이나 지배층의 모습은, 그들의 영어 숭배의식을 반영한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미국식으로 재편되면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자들이 실질적인 지배세력으로 부각되면서 이런 의식은 계속 강화되어 왔다. 이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은 사회적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 권력이 된 영어, 국민을 계층화하고 의사소통 막아
문제는 영어가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다른 가치들을 초월하는 지상목표가 되었다는 데 있다. 이렇게 문화 권력이 된 영어는 국민을 계층화하고 국민간의 의사소통을 막는다. 영어능력이 곧 사회계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최근 각 대학에서 개설하고 있는 국제학부의 경우가 바로 그런 예다. 영어구사력을 중요한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해 모든 수업을 영어로 실시하는 국제학부의 교육과정은, 국내에서 정상적인 영어교육을 받은 학생들을 자연스레 배제하게 된다. 결국 외국에서 살다 온 학생이나 사교육으로 영어구사능력을 갖춘 학생에게 특혜를 주는 입시제도가 돼 버린 셈이다.
인도의 경우도 그렇다. 영국은 식민 초기에 인도의 언어와 문화를 장려하는 정책을 펴고자 했으나, 인도의 부르주아계층이 이를 반대하고 영어 중심의 교육을 주장했다. 홍콩에서도 영어가 사회적 계층상승의 수단이 되면서 영어격차(English divide)가 발생하고 있다. 영어가 강조되는 이유는 바로 국제사회에서 의사소통을 잘 하려는 것인데, 나라 안에서는 영어 사용이 국민 사이의 통합을 가로막고 의사소통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당선인과 인수위원장은 영어능력이 곧 국가경쟁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강조하는 경쟁은 바로 개인 간 계층 간 대립과 배제를 통한 승자독식의 논리다. 영어 능력이 신분 상승의 기준이 되고 영어격차를 강화한다면, 국가경쟁력은 오히려 저하될 것이다.
세계 최고의 학업성취도와 국가경쟁력을 자랑하는 핀란드에서 경쟁은 ‘모두 함께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핀란드인들은 일상생활에서든 학교생활에서든 항상 ‘함께 일한다’는 뜻의 ‘딸꼬드(talkoot)'를 외친다. 배제가 아닌 협력과 동료의식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협력의식이 핀란드를 비영어권에서 영어능력이 가장 뛰어난 국가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의 영어 숭배의식에는 세계 최고의 미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인들은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하는 라틴아메리카인들의 빠른 증가와 성장 때문에 현재 스페인어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영어 배우기에 막무가내로 돌진한다. 국제화 시대에 필요한 다양한 외국어의 중요성마저 애써 무시하면서 말이다.
실용영어 습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깊이 있는 사고력과 각 분야의 전문성 신장이 선행돼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먼저 모국어에 능통해야 한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몇 년 전 국내 강연에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외국어를 잘 가르칠 수 있느냐’고 묻는 열성 학부모에게 ‘모국어를 잘 가르치라’고 충고했다. 요컨대 ‘모국어에 능통해야만 남의 나라 말로 정확하게 자기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