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를 반대한다. 이 기사는 논쟁중
인터넷실명제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실명제를 반대한다.

 

공직선거법 제82조6에 의하면, 선거시기에 실명확인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인터넷 언론사에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그러나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는 국가가 인터넷 언론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검열이자, 익명성에 바탕한 표현의 자유와 여론 형성의 권리를 침해합니다. 정보인권 단체로서 진보넷은 선거시기에도 네티즌이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할 수 있도록, 실명제를 거부한 인터넷언론의 기사들을 미러링하고 그에 대한 덧글란을 선거기간 동안 운영합니다. 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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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겁쟁이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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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9 11시02분 김형민

조연출들의 업무용 컴퓨터로 전환된 지 오래인 제 개인 컴퓨터 모니터에는 여러 가지 서류들 양식과 잡다한 오디오 파일들, 그리고 각 아이템별 취재 내용들로 그득합니다. 그 제목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빈도를 차지하고 있는 형용사가 '매 맞는' 인데요. 과천 매 맞는 아내, 대구 매 맞는 엄마, 강릉 매 맞는 남편, 청주 매 맞는 아버지, 서울 매 맞는 아이.....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한민국에 참 맞고 사는 사람 많구나 하는 한숨에 바닥이 꺼지게 마련입니다.

언젠가 저는 한 매 맞는 '아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남편은 폭행의 잔인함과 무지막지함으로 따져서는 긴급출동 SOS 1년 역사에서 1-2위를 놓치지 않을 걸물이었습니다. 의처증의 소유자로 기억나는데, 술에 취하거나 정신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도 지극히 태연하게 아내를 짓밟는 폭력신공의 소유자였지요.

아내가 가장 심하게 폭행당했던 것은 내밀한 집안이 아니라 대로변이라고 했습니다. 이혼을 요구하자 법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법원 앞 지하철역에서 마주 친 직후 주먹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칼바람 휘몰아치는 길거리에서 아내는 차가운 아스팔트에 뺨을 댄 채 자근자근 밟혔습니다.

"무서웠어요. 집 안에서 맞을 때보다 더 무서워. 왜 그러냐 하면 난 거리에서 그렇게 맞을 줄은 몰랐거든. 누가 와서 도와주거나 경찰이 곧 오거나 그럴 줄 알았죠.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지는 거야. 사람들이 말려도 남 일에 참견 말라고 악을 쓰면 무서워서 가 버리고, 이 년이 제비한테 홀려서 재산 다 말아먹은 년이고 새끼 학비까지 제비에게 갖다 바친 년이라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거짓말같이 사람들이 끌끌 혀 차고 가는 거야. 뭐라고 말도 안 나와요. 나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이게 다지......."

멀리 법원이 바라보이는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빠진 아내에게 구원의 손길이 닥친 것은 정신없이 맞기 시작한 20분쯤 지나서였다고 했습니다. 한 당찬 아가씨가 남편의 폭력을 가로막고 나선 겁니다.

"신랑 앞에 딱 서서는 “때리지 말라”고, “한 대만 더 때리면 신고할 거”라고 하면서 핸드폰을 들이밀어 남편 눈 앞에....... 112가 찍혀 있었대나 봐요. 그 핸드폰 딱 쥐고 그 때부터 우리 둘을 따라다니더라고. 남편이 골목으로 들어가니까 골목까지 들어와. "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한 여장부가 의기 철철 넘쳐 흐르는 눈매를 빛내며 핸드폰을 높이 치켜든 채 남편을 위압하는 멋진 장면을 머리 속에서 편집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험악한 주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면서 한 대 쳐 봐라 응? 하면서 차가운 미소를 머금는 대찬 처녀의 부르쥔 주먹과, 그녀의 등장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의 얼굴을 교차 편집하다 보니 심각한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흐뭇한 감탄사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허 참 대찬 아가씨였네요." 그런데 아주머니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대찬 아가씨가 아니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면서 의아한 눈빛을 던지자 아주머니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그 아가씨 말리는 내내 파들파들 떨고 있었어요. 우리 신랑이 주먹을 쥐고 때릴 듯 하면 주저앉아서 엄마야~~ 그랬다니까. 내 보기에도 나만큼 겁먹었던 거 같애. 핸드폰도 두 손으로 쥐고 있는데 바들바들 떠는 게 손에 보였어요. 그런데도 계속 뒤따라오는 거예요. 이빨 딱딱 부딪치면서 아저씨 때리지 마세요 신고할 거예요....... 신고할 거예요..... 하면서......"

처음에는 남편은 아가씨의 만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아가씨가 112를 기어코 누르고 예의 겁먹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위치를 알려 주는 지경에 이르자 아내에 대한 폭력을 멈추었고 골목길에 지하철역까지 따라붙으며 아줌마를 놔 주라고, 안 그러면 신고한다면서 '이빨을 딱딱 부딪쳤던' 가냘픈 처녀와 마누라를 놔 둔 채 자리를 떠 버렸다고 합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이름도 못 물어 봤어요. 그런데 다시 만나면 막 웃으면서 물어볼 것 같아요. 도대체 무슨 용기로 날 구해 줬냐고....... 우리 신랑이 훅 불면 날아갈 거 같이 야리야리한 아가씨가 말이야..... 그런데 날이 지날수록 고마와져요. 힘도 없고, 겁도 많은 아가씨잖아요. 덩치 좋고 젊어 팔팔한 청년들도 많이 지나갔거든. 그런데 그 아가씨가 내 목숨을 구해 준 거예요. 오버한다고? 아니에요. 나 그날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길거리에서 그렇게 비참한 꼴 보이고 살아갈 기력 없었을 것 같아.'

지금도 아주머니는 버스를 타거나 길을 가면서 그때 그 아가씨와 체격과 인상이 비슷한 이들을 보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그녀를 만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라지요.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남편으로부터 비롯되는 죽음 같은 공포를 몇 번 맛보았지만 그때마다 아가씨의 떨리던 목소리와 손을 생각하며 저항을 시도한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이혼 뒤로도 찾아와서 스토킹을 했고, 그게 우리와 만난 이유였죠) 그리고 언젠가 자신도 술 퍼먹고 마누라를 북어 취급하던 한 남자의 앞에 뛰어든 적이 있노라며 웃었지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를, 가냘프기 짝이 없고 대차기보다는 유약함에 가까운 아가씨가 드러내 준 용기가 한 사람을 바꾸었던 겁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주를 구한 것이다’라는 격언에 진실성이 담겨 있다면, 그녀는 우주를 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 맞는 아내 뿐 아니라 이 '젠장 맞을' 세상에서는 너무도 부당하고 끔찍하게 '매 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매는 육체적인 구타를 포함한 부당한 억압과 끔찍한 위협이며, 그 가해자는 비단 한 개인이 아니고 사회가 될 수도 있겠지요. 생존권에까지 가혹한 매질을 당하고 있는 이랜드, 뉴코아, 콜텍, 경남제약 조합원들도 '매 맞는' 여성들일 것이고, 법으로 보장된 파업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노동자 10대가 벌어도 이르지 못할 손배가압류의 방망이에 머리통 터지는 '매 맞는 남편'들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 이웃집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남편의 욕설과 발길질에 지르는 비명이 귀에 들려 올 수도 있겠구요.

그 모든 꼬락서니를 목도하면서 거기에 끼어들고 함께 싸우고 막아 주기엔 내 처지가 너무 바쁘고 빈약하며 귀찮을 수도 있지만, 힘도 없고 결기도 빈약한 주제에 파들파들 떨리는 두 손에 받쳐 든 핸드폰을 무기로 야차 같은 폭력 남편에 맞섰던 여장부답지 않은 여장부를 떠올리면 문들 그 분주함과 나약함과 무관심이 슬며시 붉은 빛을 띠며 수그러듭니다.

조금만 더 오지랖을 넓힌다면, 그 아가씨의 경지에는 감히 이르지 못하더라도 112 신고라도 해 주며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된다면, 문득 길을 가다가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하고 농성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만났을 때 잔돈 챙겨 따뜻한 음료수라도 사 줄 깜냥이라도 갖게 된다면, 누군가 절박하게 나눠 주는 유인물 한 장으로 쓰레기통 덩크슛 연습하지 말고 주의 깊게 읽어 줄 관심이라도 짜내 준다면, 이웃집에서 뭐 깨지고 비명 소리 들리면 왜 그러십니까 물어나 주는 센스를 늘려 준다면, 새해는 조금 더 밝아지지 않을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덧붙임

김형민 님은 방송 노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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