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 아니라 외국회사들 배를 불려주는 시장일 뿐’이라는 안철수씨의 발언이 많은 사람들의 IT산업에 대한 허상을 깨며 충격을 주었다. 장비뿐 아니라 SW도 대부분 외국제품이며 우리 기업의 기술력은 세계 수준에 비하면 형편없이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무엇이 우리 IT산업의 기술력 개발을 뒤로 한 채 허상만 심어주었는가. 그 허상 뒤엔 어떤 문제가 숨어있나.
재벌기업의 ‘누워서 떼어먹기’ 장사
우리의 IT산업은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SW산업은 특히 몇몇 대기업 계열 SI업체들이 독점하고 있다. 이들은 계열사에 의존하거나, 하도급 업체를 압박하여 이익률을 채우고 있다. 그런데다가 대기업들이 직접 관리하는 10여 개의 협력업체 외에는 직접 거래하지 않음으로써 중소기업의 도급차수는 늘어나고 불합리한 하도급 구조는 더욱 다단계로 늘어난다.
계약서상 원 발주자는 ‘갑’으로 기록되고 원 수주자는 ‘을’, 원 수주자(원청업체)에게서 1차로 하도급을 받은 업체는 ‘병’, 그 다음은 ‘정’, ‘무’ 순으로 부른다.
IT업계 종사자 A씨는 규모가 꽤 큰 중견기업에 근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 카드회사의 시스템을 개발할 때는 ‘병’으로, 모 쇼핑의 경우에는 ‘무’, 모 마트의 경우에는 ‘정’으로서 일했다고 한다.
“삼성SDS나 엘지CNS 등 대기업은 자기들이 직접 개발하는 거 없어요. 기술이 필요하면 해당되는 업체를 끌고 와서 하죠.”
“예를 들자면 A라는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있으면 그쪽 일을 따는 것은 삼성SDS나 엘지CNS, 롯데정보통신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대기업 계열의 SI업체가 물고, 바로 다음 업체가 개발업체가 되거든요. 다음 개발업체는 30~40명 단위의 회사나 레퍼런스 참고가 될만한 사이트를 가지고 있는 데가 되겠죠. 그 다음 업체들이 자기 안 되는 기술이라든지 외주를 주거든요. 저희 같은 경우도 그런 식으로 들어간 거고…… 저 같은 경우는 ‘병’이나 ‘정’, 심지어 ‘무’까지도 들어갔어요.”
업계 공히 저가입찰을 기본으로 하다보니, 원 발주자에게서 대기업도 저가로 수주한 후 30~45%의 수익률을 남기고,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중소기업에게 저가로 넘긴다. 그 기업이 또 자신의 비용을 공제하고 재하도급을 넘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아래 단계 기업에게 손해를 떠넘기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운영비용이라도 건지려는 업체들의 출혈ㆍ과당경쟁이 심하고, 단가산정이나 계약조건이 교섭력에 따라 좌우되는 실정이라 중소기업들은 불리한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 폐해는 소규모의 기업일수록 더욱 심각하다.
“그런 식으로 내려가다 보면 맨 밑의 단계에서는 거의 공짜로 해주는 경우도 있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참고사이트가 된다고 해서 공짜로 해줘요.”
이런 관행들은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그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점점 더 열악하게 몰고 간다.
A전자 해외법인과 본사간의 정보공유시스템 개발에 참여했던 B씨에 따르면, 당시 모 재벌사는 1인당 월 600~700만원을 수주단가로 A전자에 주문했는데, 재벌사측이 나중에 B씨의 회사에 제시한 단가는 360만원이었다. 당시 참가한 다른 개발자에 의하면, 이 재벌사는 B씨 회사 10년차와 재벌사 3년차 직원의 단가를 비슷하게 설정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IT노동자들을 기술개발이나 교육은 뒷전인 채 생활에 허덕이며 만들거나, 결국은 IT업계를 떠나게 하기도 한다. 사람을 통한 기술력의 개발과 축적이 무엇보다 중요한 산업으로서는 치명적인 근본문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정부도 재벌기업 몰아주기
정부의 IT강국 운운이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은 정부나 공공기관의 발주도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한국전산원 기록에 의하면, 2004년 시행된 정보화지원사업*주)에서 2004년 현재 서비스단계인 정부부처 정보화사업 13건 중 12건이 재벌그룹계열 대기업이 수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정보화추진위원회 기록 중에서)
정부나 공공기관의 발주담당자들도 대기업을 선호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는 물론 대기업의 로비도 한 몫 한다는 사실은 이제는 비밀도 아니다. 로비나 인맥이 아니더라도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입증할 구체적 방안이 없고, 저가입찰 중심의 관행 속에서 자본력 우위에 있는 대기업을 중소기업이 따라잡기는 매우 힘든 일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주) 정보화지원사업 : 정보화촉진기본법에 의해 정보화촉진기금을 지원받은 사업
2004년 4월 ‘대기업 입찰제한 규정’이 생겼다. 규정에 의하면 5억 이하 프로젝트는 대기업이 수주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 부분에 대해 규정을 위반한 사례를 적발한 사실이 있는지 정보통신부에 질의한 결과, 2004년 10월 5일 현재 적발 사실이 한 건도 없다는 정통부의 답변이 있었다. 과연 많은 대기업들이 너무나 규정을 잘 지켜서 위반 사례가 없는 것일까. 정부의 관리감독 의지는 있었던 것일까.
제보에 의하면, 5억 이하 금액의 프로젝트들은 여러 개 모아서 덩치가 큰 프로젝트로 만들어 대기업에 발주하는 식이라고 한다. 5억이라는 금액 규정 자체도 현실적이지 못하고, 그나마도 편법으로 빠져나가 유명무실해진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입찰제한 규정 자체가 있으나 마나 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밖에 몇 가지 정부의 IT중소기업 보호육성 방안이라는 것들이 있으나 모두 면피용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다. 노무현 정부의 재벌위주 경제정책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암중모색
이제 정부 차원에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IT, 특히 SW산업에 있어 무대책으로 일관하며 각종 부조리와 모순을 방치하여 썩은 사과만을 키우고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대책을 세우고, 적극적인 실행의지로 관리감독해야 한다.
정부나 공공기관 시행사업의 입찰에서부터 저가입찰 중심보다 기술력이 우선 고려되어야 하고, 중소기업이 직접 응찰할 수 있는 길도 적극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일단 제도적인 장치가 매우 필요하다.
많은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 차원의 기술력 인증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SW산업 관련 몇몇 단체나 기관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필요한 역할을 하는 곳은 드물다.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 일단 대기업을 끼워 넣고 보는 관행을 끊으려면, 어느 기업이든 공정하게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으려면 기술력을 인증해 줄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재벌 대기업이 하도급으로 당장의 수익을 확보하는 것 보다 자체 기술력을 개발하는 데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재벌기업의 계열사 의존도를 줄이도록 강제하고, 입찰제한을 확대하며, 불법적인 다단계 하도급 구조를 제한, 관리 감독할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그리고 파견과 비정규을 양산하는 구조를 없애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적용하여 기술력 중심으로 노동대가가 산출될 수 있도록 하여야 지금과 같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인 수 많은 IT노동자들의 상황도 한결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IT노조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