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합주의 정치의 폐해
개량주의는 나쁘지만, 개량투쟁은 필요한 것처럼, 조합주의는 나쁘지만, 조합 중심의 활동은 필요하다.
적대적 계급관계로 유지되고 지탱되는 자본주의사회 하에서 노동조합운동은 필연적일 뿐 아니라, 보편적 계급투쟁의 유의미한 표출이다. 그러나 조합 활동에만 매몰되는 것으로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꿀 수 없다. 조합주의운동의 한계는 곧 노동조건을 일부 개선함으로써―임노동자의 고통스런 상태를 조금 더 버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임금노예화에 기초한 사회질서 전체의 유지에 오히려 기여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레닌의 지적에 따라) ‘노동조합적 정치’의 개량주의적 한계라고 부른다.
노동조합은 이처럼 체제내적-개량주의적 일상활동체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즉 자본가에게서 일정한 양보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결코 반체제나 반자본의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그러면 노동조합운동은 덧없고 무익한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절충과 타협, 제도개선투쟁에 머무는 노동조합적 정치나, 자본주의 틀 내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오는 실리주의적-사민주의적 정치를 현재의 노동운동 및 노동정치운동은 과연 얼마나 극복하고 있는가?
그러나 맑스는 이와 같이 비록 체제내적 개선투쟁에 주로 몰두하게 되는 노동조합 자체를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학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학교는 학교일 뿐이다. 학교 과정을 다 마치면 졸업을 해야 한다.
즉 투쟁 속에서 사회비판적 계급의식화나 자본/국가의 본질에 대한 계급적 각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맑스는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고, 노동조합조직이 미래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정치적 훈련과 체제비판적 의식화를 위한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파악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만일 현실의 노동조합운동들이 “사회주의를 위한 학교”의 구실을 다하지 않고, 자본/국가와의 무익한 공방전으로 소일한다면, 그리고 대중에게 개량주의적 허위의식만을 갖게 한다면, 그리하여 임노동제 전체의 폐지를 위한 반자본의 총노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노동운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노조는 “사회주의를 위한 학교”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위한 학교’로 전락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철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2. 변혁정치로의 전환
노동조합의 협소한 형식(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정치활동이나 정치의식의 면에서 그 이상의 발전, 즉 정치의식적 혹은 사회주의정치적 발전을 실현할 가능성은 현재로 보아 1차적으로는 현장조직 활동가, 해고자, 노동정치운동단체 활동가 등에서 발견될 수 있다.
만일 맑스주의적 사회주의를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현재의 일진일퇴하는 자본주의적 노동운동과 그 조직적 표현인 노동조합적 정치활동은 계급의식화된 선진 사회주의노동활동가들에 의해 ‘변혁적 노동운동’과 그 일상적 활동으로 완전히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운동의 부문운동으로의 전락이나 생래적인 한계를 이유로 비노조적인 또 다른 조직체를 추구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이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추후 별도로 다시 검토하기로 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투쟁의 일상기에는 (레닌이 『공산주의와 좌익소아병』에서 극히 올바르게 강조했듯이) “노조라는 진흙탕에 우리는 발을 디뎌야만 한다”는 점이다. 즉 사회주의자는 노동조합 속에서 변혁적 흐름을 만드는 대중사업에 주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적 정치를 비판한다고 해서 반드시 노동조합 속에서의 활동 전체를 무시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변혁적 노동운동가는 노동조합과 그 내부의 대중들을 올바로 지도하고 견인하며, 투쟁의 발전 속에서 그들이 체제변혁적 의식화를 성취할 수 있도록, 그리고 투쟁 속에서 성장한 활동가들을 더욱 사상무장화되고 변혁이념화된 ‘사회주의전위’로 이끌어야만 한다.―한 마디로 변혁운동가는 노동조합 속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해야 하고 계급투쟁의 모든 측면들을 올바로 지도하는 당적-혁명적 역할을 다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계급적 좌파” 혹은 “사회주의적 노동운동 진영”,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 등으로 불리우는 ‘변혁지향적 노동운동가’들은 자신의 변혁적 노선의 관철을 위해 현실의 무엇에 대해 싸워야 하는가?
―체제에 포섭당하는 절충적 노동정치, 경제주의적 투쟁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시종일관하는 노동조합적 정치활동, 노동운동의 목표를 “노동해방주의적-반자본주의적 체제변혁”에 두기 보다는 정치-경제적 개량의 획득에 가두는 개량주의적 노동조합활동―이러한 것이 변혁지향적 노동운동가가 싸워야 할 대상이고, 바로 이러한 투쟁에 전선을 확정하고 몰두함으로써 ‘변혁적 노동운동정치’가 발전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글을 작성하기 시작할 때는 구체적인 ‘행동강령’까지 정리하려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구체적인 활동의 기획과 아이디어, 현실적인 활동양식과 실천사업 등에 관해서는 오히려 동지들이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변혁이념의 구체화를 위한 현 단계 활동계획에 관해서는 동지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다만 두 가지만 지적한다.
현 시점의 우리 운동에서는 경제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저널은 지천에 깔려 있으나, 사회주의적 저널이 부족하고, 뛰어난 필자들이 부족한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문필활동은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다. 따라서 인터넷이나 오프라인 저널의 지면에서 사회주의적 필자들이 왕성하게 자신의 주장을 최대한 펼쳐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아울러 토론과 논쟁, 비판과 논평 등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적-변혁적 정치운동이 충분히 활성화되지 못한 까닭에 논의의 수준이 지극히 조합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한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사상적 사업과 실천적 노력의 축적은 이후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이 아닌 새로운 변혁적 계급정당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중대한 역할과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사상과 실천의 결합―이 중에서 특히 사상작업은 일상적 실천의 하중에 눌려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보다 원칙적이고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이 아쉽다.
(추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롯한 레닌의 저작집을 권한다. 레닌주의에 대한 학습의 부재는 곧바로 당 건설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 부재로 이어지고 있다. 사민주의의 반대물로서 구성된 것이 레닌주의이며, 맑스에만 머물지 않고 더욱 (특히 정치학적으로) 그것을 발전시킨 사상이 레닌주의라고 한다면, 선진 노동자계급에게 필수적인 학습 중 하나는 바로 레닌에게서 도움을 얻는 작업이라고 본다.)//0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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