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를 반대한다. 이 기사는 논쟁중
인터넷실명제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실명제를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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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절을 기념하며
문국진
1. 8시간 노동제의 쟁취

노동절은 본래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근로자의 날”이라고 불리웠다. “노동자의 날”이라는 명칭을 획득한 것은 그리 오랜 날이 아니다. “노동절”은 본래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노동자계급의 대축제이다. “8시간 노동제의 전면 실시”를 획득한 것을 기념하여 노동절이 생긴 것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8시간 노동제”는 이후 전 세계에 파급되어 노동의 시간 단축이 보편화된 것이다.

2. 노동시간 단축의 중요성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은 “소외된 노동” 즉 자기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즉 주인에게 봉사하는 “노예의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헤겔 및 포이에르바하의 “소외의 이론”에 근거하여 노동의 본질을 규명한 맑스에 이르러 정립된 사상이다. “노동의 자기소외”가 자본주의하의 노동의 본질인 것이다.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이해해 보자---

노예의 자기 시간의 쟁취는 바로 노예의 자기 해방과 자유의 획득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착취를 최대한 경감하고, 근로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자유시간”을 얻어내는 투쟁---이것이 바로 피로써 쟁취한 노동자의 시간 단축이다. 오늘날 유럽은 8시간노동에서 7시간노동으로, 다시 6시간노동으로 노동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있다. 어느 나라는 4시간까지 단축한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80년대에 백원담 번역으로 나온 內海義父의 『노동시간을 중심으로 본 세계노동운동약사』(화다출판사)를 보면 노동시간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 간의 치열한, 그리고 피로 점철된 역사를 알 수 있다. (비매품. 연세대 도서관 소장서)
노동시간의 양은 바로 계급투쟁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3. 자유시간의 중요성

남한에서 토요일 격주 휴무가 실시된 것은 다름 아니라 그동안 치열히 전개되어 온 노동자계급투쟁이 획득한 역사적 떡고물이다. 지금 은행 등에서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한참 멀었다. 8시간 이상 근무하는 사업장들이 태반이고 중소영세사업장들은 계급투쟁력이 약한 상황을 반영하여, 잔업, 특근, 철야가 일상적이다. 심지어는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 등 대공장에서도 잔업, 특근, 철야 등이 밥 먹듯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청 등에서는 납품 기일을 맞추기 위해서 노동시간이 자본가의 맘먹는 대로 연장되기도 한다. 장시간의 노동시간의 결정은 여전히 자본가의 수중에 달려 있다.

오직 계급투쟁의 역관계만이 노동시간을 1시간이라도 단축할 수 있는 힘의 논리를 드러내는 관계인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의 자유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노동자는 퇴근 후에야 비로소 자기 시간을 갖는다. 그전에 노동의 시간 내에서는 꼼짝없이 자본가의 지배 하에 놓여 있다가 퇴근 후에야 비로소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러나 생산노동시간 이후의 자기 시간이라는 것도 사실은 자본의 유통과정의 시간, 즉 소비과정에 포섭되어 있을 따름이다. 식당에 가거나 술집에 가더라도 거기도 역시 자본주의사회 내부이고, 노동자는 소비하고 가두유통과정에 놓여 있음으로 해서, “자본의 실현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이로써 자본은 노동을 철저하게 착취한다.

퇴근 후에 자유시간을 갖게 된 노동자는 그러나 책을 읽는다든지, 영화를 보러 간다든지,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낸다든지 해서 여유와 문화, 여가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재충전의 시간은 어찌 보면 자본의 더 세련된 지배, 즉 노동자로 하여금 충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함으로써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해준다는 기대효과, 그리고 노동자가 읽는 책에 따라서는 더 훌륭히 자본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영어공부, 업무관련 서적, 컴퓨터공부 등으로 자유시간마저 자본을 위한 투자로 만들어버리는 기대효과를 얻어내고 있다.

반면, 노동자의 더 많은 자유시간은 곧 계급적 의식의 강화, 주체적 집단 활동의 강화, 그리하여 변혁을 위한 노력의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무한정의 관철을 위해 장시간 노동이 강제되었던 시절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조금 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간의 획득은 불가능하였었다. 모든 것을, 모든 시간을 자본과 국가에 바쳐 헌신한 선배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오늘날의 풍성한 경제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50대 이상은 바로 이렇게 살아온 세대이다.

오늘날 노동자의 더 많은 자유시간의 확보는 바로 선배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인해서 얻어진 것이지, 결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유시간은 노동자에게 황금과도 같은 시간이다. 자기 자신의 개발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 더 많은 지식과 문화로 노동의 피로(疲勞)를 덜어내고, 문화적 자유인으로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동물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노동으로부터의 자유”야말로 노동자의 발전과 노동투쟁생활의 발전과 변혁적 노력의 축적을 가져오게 하는 “해방의 무기”이다. (제레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을 참조하시오)

4. 세계노동절은 “노동자 국제주의”를 말해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최고-최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레닌, 『제국주의론』)은 식민지/반(半)식민지들을 자본주의화시켰다. (조선의 ‘내재적 발전’을 억누르고 일제가 실시한 외재적 근대화에 따른 조선의 자본주의화의 기점이 1910년대부터인가, 아니면 1930년대부터인가에 관한 논쟁은 여지껏 끝나지 않았다. 참고로 북한역사학계는 일제에 의한 본격적인 중공업화를 1930년대부터라고 규정하고 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반대하는 식민지자본주의론)

또한 1948년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반제/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운동의 담론들은 이미 맑스와 레닌 및 그밖의 맑스주의자들에 의해서 원초적으로 다루어진 바 있다. 자본주의의 논리와 그로부터 인한 계급투쟁의 논리는 이미 1840년대, 1900년대에 이미 파헤쳐졌다. 그런데 맑스주의란 다름 아니라 “노동자국제주의”에 다름 아니다. 전 세계적인 통합성의 증대에 따라, 자본의 국제주의적 발전에 따라 ‘노동의 국제주의’ 역시 발전해 온다.

프랑스혁명은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고(베토벤의 웅장한 음악과 헤겔의 시대정신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러시아혁명은 이후 스탈린에 의해서 코민테른, 즉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해서 전 세계에 스탈린주의적 공산당운동들을 파급-발전시켰다.

동유럽의 공산주의화, 북한의 김일성 집권 등은 소련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다(혁명의 국제적 수출). 물론 중국은 다르다. 중국은 “맑스주의의 중국화”의 기치하에 “모택동사상”이라는 독특한 혁명이념으로써 소련식 혁명론으로부터 독립하고 1950년대 중소분쟁으로 소련과 치열하게 대립하기도 하였고, 북한은 중소로부터의 외교적-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면서 “주체사상, 즉 김일성사상”을 전개하였고, 전 세계에 걸쳐 “주체사상연구소”를 파급시키고 있다. 쿠바는 미국의 뒷 뜰에 자리 잡아 막강한 미국 군사력으로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강대하게 생존하고 있다.

그런데 “일국사회주의냐, 국제주의냐”의 논쟁은 철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아직 해결되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일국내 사회주의의 건설과 제국주의 반동에 대한 국제적 투쟁, 따라서 혁명의 수출---양자는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런데, 전자 없이는 후자는 불가능하다. 강고한 군사력, 내부의 정비, 노동독재정권의 강화 등 일국내 사회주의 강화 없이는 외부에 대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자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지구화, 지구촌은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다. “노동자 국제주의의 옳은 노선”은 이제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다. 인터넷과 국제전화는 사회주의의 건설이 곧 “전기(電氣)와 공산주의의 결합”이라고 했던 레닌의 말을 현실화하는 과학적 수단이 되었다.

물론 레닌조차 1917년 러시아혁명 정권 수립 이후에 밑으로부터의 노동자 자주관리운동들을 억압하였고, 공장위원회와 심지어는 소비에뜨운동들을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이정희 교수의 『볼세비끼 사회주의와 노동자자주관리운동』, 서울대 서양사 박사학위논문 참조) 그리하여 위로부터의 강력한 스탈린주의 독재의 초석을 제공했지만.

그러면 지금 현 시점에서의 “노동자 국제주의를 위한 실천”의 과제와 방향은 무엇일까? 그것은 국내의 변혁주의운동의 원리와 유사하다---즉 전위들의 조직적 활동의 발전과 기층 대중의 투쟁적 활동의 발전이다.

국제적인 전위조직의 건설(오늘날 국제트로츠키주의적 전위운동의 건설이 활발하듯이), 국제노동협회나 국제노동기구, 국제노동운동의 교류 등이 현시점에서 가능한 운동들이다. 남한 정세의 특수성으로 인해 오늘날 남한과 북한 간의 교류 역시 국제적 운동이다.

결론: 전 세계의 개조(改造)를 향하여

민족과 인종, 국가로 분열된 세계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발흥으로 인하여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는 보편적 세계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것, 인간사회라는 사실 앞에서 이제 민족이나 국가가 따로 없고 동양과 서양이 따로 없다.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이 자본주의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모든 나라의 기본모순은 이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미제국주의와 피지배국가 간의 갈등과 반목으로 보편화되고 있다. 전 세계에 있어서 “노동자는 하나다.” 모든 개별적 노동자, 모든 특수한 직종, 업종, 기업을 뛰어넘어 “노동자는 하나다.”

남한 노동자운동은 이제 전 세계 노동계급해방투쟁에 그 선두가 되어야 한다. 분열을 겪고 있는 전위들의 운동 역시 이제 화합과 통합을 향해, 분열과 반목대신, 정치력에 기초한 조직들 상호간의 유기적 협력과 일치의 강화로 나서야 한다. 개별화에서 보편화로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운동의 유치한 단계에 머물지 말자. 전 세계의 개조는 바로 우리 노동운동 세력의 역사적 과업이고, 그것은 바로 “통 큰 정치”로써만 해결될 수 있음을 깨닫자.// 050430
* [필자 소개 : 문국진]
민주노조운동연구소/노동사회과학연구소/사회이론연구소-빛나는전망 객원 연구원. 노동넷에 진보컬럼니스트로 활동. 현재 고려대학교 박사과정 준비중임. 저서로 <반제반파쇼운동론> <혁명이론의 빈곤>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 연구> <노동해방의 논리를 찾아서>가 있다.
2005년04월30일 16: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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