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민주노총 내 제분파 간의 갈등과 대립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겉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전투파의 행동을 막가파식이라거나, 막무가내라거나, 부르주아 국회같은 충돌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드러난 현상만으로는 본질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몸싸움의 정치적 배경이 더 중요하며, 그 치열한 부딪침의 근본적 원인을 읽는 것이 당연히 더 중요하다. 지도부의 강행에 대한 물리적 저지는 그 지도노선에 반대하는 입장과 세력에게는 하나의 정치적 입장의 표명이자 정치적 행동 그 자체이다. ‘노사정 복귀’라는 문제가 이제 한국노동운동의 정치적 운동방향을 결정짓는 절대적 사안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2. 타협주의적인 노동운동의 파국적 치달음
전노협 정신, 현장에서의 전투적 정신은 이제 실리주의 정신, 절충주의 정신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다. 민주노총의 역사적 등장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노총의 정권화해성, 자본화해성과 다른 ‘민주성’의 노동자 독자조직화로서의 민주노총의 건강한 성격을 기억해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수호 집행부는 과연 민주노총을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는가? 그것은 자본 및 정권과의 화해와 상층적 협력에 의해 밑으로부터의 투쟁들을 희석화하려는 개량주의 정치적 지도노선이 아닌가? 혹은 지배자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계급투쟁들을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치적 야합에 한 몫 거드는 것이 아닌가?
전반적으로 밑으로부터의 현장투쟁들에 절충주의 정신과 타협주의 정신을 유포하고 개량화시키려는 ‘체제유지적 노동운동’의 기만적 성격을 강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노동운동 전반에 미치는 이러한 파국적 결과 때문에 이수호 집행부와 그 협상주의 세력에 대한 지금의 반대와 투쟁이 필연적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민주노총은 어디까지 타락해갈 것인가?
3. 노동조합운동의 체제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전선을 지켜야 한다
레닌의 『공산주의와 좌익소아병』은 우리에게 노동조합이 비록 체제내적 투쟁형태이지만, 사회주의자는 바로 그 속에서 자신의 활동을 펼쳐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 즉 맑스, 엥겔스, 레닌, 로자, 트로츠키 등은 비록 노동조합이 자본주의적인 체제내적 조직이지만,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하나의 학교”로서의 역할을 하며, 노동자계급에게 변혁주체로서 자신을 강화하고 훈련하는 투쟁기관으로서의 현실적인 의의를 강조한다.
역사발전에 있어서 그 역사적 의미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의회운동론’이 현실적 의미를 상실케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자본주의 발전의 일상기에 노동조합에 개입하고 그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사실을 평의회운동론은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혁명적 대중투쟁기관으로서의 평의회 지향은 노동자계급 정신의 혁명적 도약이라는, 노동자권력지향 운동의 명확화라는 긍정적 측면도 지니고 있다.) 현대사회의 다른 모든 개량주의운동들과 구분되어지는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적-사회적 역할은 바로 여기서 주어진다. 즉 그것은 체재내적 투쟁임과 동시에 체제변혁적 주체역량을 강화시켜 준다.
노동조합은 분명 ‘자본으로부터의 양보의 획득’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그 투쟁과정은 여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투쟁과정 속에서 주체인 노동계급은--전진과 후퇴의 순환과정을 경험함으로써--자본주의의 질서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계급의식화’로 나아갈 수 있게 되며, 사회 전체의 변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또 스스로 그 변혁의 주체로서 자기의식화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투쟁은 단지 노동조합적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자는 노동조합적 투쟁의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노동계급의 변혁주체화를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념적-조직적 표현이 바로 당이다. 따라서 당의 건설은 바로 당적 주체를 형성하는 투쟁이자, 그 역량들(보통 선진 노동계급이라고 불리우는 역량들)이 노동전선에서, 즉 기층 현장뿐 아니라, 지금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국적 사안의 투쟁현장에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대중 속에서 투쟁의 기풍을 활성화시키는 당적 활동에 의해 마련되고 강화될 수 있다.
노동조합운동의 목표는 단지 임금과 노동시간, 노동제조건의 개선에만 한정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비정규직운동 역시 이러한 열악한 환경 개선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 자체의 체제내적 한계, 즉 임금노예화를 뛰어넘지 못하는 임금노예화의 재생산기구, 결과로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공격의 성격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주체의식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의 양보 획득에 머무는 개량의 성격--이것은 바로 그 극대화가 자본정권과의 체제내적 계약과 정치적 절충에로 나아가게 하는 노동조합운동의 개량적 필연성의 근거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노동조합운동의 변혁운동적 측면도 공존한다. 미래의 선취(先取)로서의 평의회운동 지향, 전체 운동을 선도해나갈 변혁적 정당의 형성과 강화, 즉 평의회와 당 못지 않게 사회주의자가 현실에서 자본주의 질서와 싸우는 그 투쟁의 공간이 바로 노동조합이며, 개량적 지도부와 맞서 싸우면서 대중과 함께 투쟁으로 돌진할 수 있는, 즉 변혁적 운동의 강화를 위한 공간이 바로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운동은 바로 그 자신과의 투쟁, 즉 ‘노동조합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체제내적 운동을 지양하고 변혁적 운동의 주체적 조건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한다. 민주노총 지도부와 일부 노동조합주의적 관료적 세력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의 필연성은 바로 여기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즉 민주노총을 어떠한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 개량이냐, 변혁이냐?
4. 민주노총을 둘러싼 싸움의 의의: 변혁파 진영의 강화를 위한 정치적 계기
노동조합의 제활동에 개입하는 것은 이처럼 변혁진영의 주체 획득과 그 주체화를 위한 필수적인 일상 과제이다. 당을 건설하는 과정과 체제내적-대중적 투쟁에 개입하는 활동 과정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서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밑으로부터 투쟁을 통해 올라온 선진 노동계급 진영은 다른 한편의 진영, 즉 자본주의 발전과 계급투쟁의 성장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형성되기 마련인 노동운동내 개량주의 세력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편으론 경제주의나 실리주의에 부딪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주의나 조합주의에 부딪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수호 지도부에서 보이듯이 타협주의, 협상주의, 계급간 절충주의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왜곡에 맞서 계급대중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려면 전투파 진영의 선도적 문제제기와 비타협적 투쟁이 관건으로 등장한다.
바야흐로 이제 계급투쟁은 자본과 국가에 대한 외부적 투쟁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그 자체 내에 뿌리를 둔 내부 기회주의 세력과의 화해할 수 없는 내부계급투쟁전선으로 심화ㆍ확대되고 있다. 이 투쟁은 일시적인 승패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변혁적 진영을 강화하고, 노동운동의 향후 근본적 방향에 있어서 노동대중의 투쟁이 나아갈 바를 그 개량주의적 반대물에 대한 투쟁전선을 보다 명확히 함으로써, 보다 밑으로부터의 계급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노동조합운동을 이끌어간다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
만일 지금 형성된 사회주의 진영과 전투적 노동운동 진영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면, 이수호 집행부에 대한 정치적 투쟁은 단지 집행부 상층에 대한 비판투쟁으로서만이 아니라, 바야흐로 남한노동운동의 미래 방향을 둘러싼 변혁적 주체의 자기 형성의 문제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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