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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은 지금,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된 강승규 수석부위원장 사건으로 창립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집행부는 이에 대해 '현 지도체제로 하반기투쟁을 수행한 뒤 조기선거 실시'라는 대책을 내놨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태의 심각성에 애써 눈을 감은 안이한 상황인식이자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한 발상입니다.
1. '강승규 사태'는 민주노조운동 정체성의 위기입니다
민주노조진영에서는 그 동안 산하조직의 비리사건이 몇 차례 불거져 노동자의 분노를 사고, 국민에 실망을 안겨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노협과 민주노총을 거치면서 전국중앙조직(총연맹) 핵심간부가 비리혐의, 그것도 사용자단체한테서 청탁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건 초유의 일입니다.
더욱이 비리의 당사자가 핵심지도부의 일원이자 조직혁신위원장, 채용비리대책위원장 등 조직의 도덕성을 올곧게 세우는 중책을 맡은 인사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입니다. 이는 이번 사건이 한 개인의 부패추문에 그치지 않고 민주노총 전체의 자주성 훼손과 도덕성 실추로 이어짐을 뜻합니다. 실제로 민주노총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소속 조합원에게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안겨줬고, 국민적 신뢰는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멀리는 70년대, 가까이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선배, 열사들의 피로써 쌓아올린 민주노조운동의 대의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조직을 위기로 내몬 참담한 사건에 다름 아닙니다.
2. 현 집행부의 자진사퇴를 거듭 촉구합니다
민주노총이 이와 같은 사상초유의 위기를 벗고,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은 조직적으로 분명히 책임지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이미 도덕성이 훼손되고, 대중적 지도력을 상실한 지도부의 자진사퇴밖에 없습니다. 민주노총은 지난 10여 년의 역사에서 조직의 위기를 부르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을 경우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이번 사태는 하물며 지도력의 근간이 되는 도덕성이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현 집행부가 보여준 태도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자진사퇴는 그만 두고, 상당수 가맹·산하조직 대표자(중앙집행위원)들이 총사퇴를 요구했음에도 끝내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집행부가 사퇴불가의 근거로 내세운 '하반기투쟁을 앞둔 지도부 공백과 그에 따른 혼란과 무장해제'는 그야말로 옹색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 등 노동자의 삶을 좌우할 하반기 투쟁현안이 더없이 중요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지도력을 상실한 현 집행부가 투쟁의 구심점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무망한 일입니다. 오히려 이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조직에 혼란을 부르고, 투쟁에 걸림돌이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땅바닥에 떨어진 조직의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돼야 하반기투쟁도, 새로운 지도력 구축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한책임을 지겠다'면서도 '지도부 공백'을 내세워 실질적으로는 책임을 회피하는 집행부의 태도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한 발상이거나, 파벌의 이해를 최우선하는 종파적 행태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습니다. 지도력은 조합원한테서 나오는 것이지 특정 세력의 주관적 의지로 구축되는 게 아닙니다.
현 집행부는 '손이 썩었으면 손을 자르고, 발이 썩었으면 발을 자르고, 머리가 썩었으면 목을 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직의 수뇌부가 이미 썩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말이 공허한 수사가 아니라면 말 그대로 당장 목을 쳐야 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이를 외면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3. 대신 속죄하는 심정으로 민주노총을 사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길게는 민주노총 창립 때부터, 짧게는 지난 수 년 동안 민주노총 사무총국의 일원으로 노동자 대중의 권익향상과 평등사회 실현을 위해 일해온 전문활동가들입니다. 오로지 사회진보를 위해 땀 흘린다는 자부심 하나로 일해왔습니다. 민주노총이 대중적 신뢰를 잃으면 우리 활동의 정당성도 함께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강승규 사건'이 표면화된 지난 10월7일 이후 상임집행위원을 뺀 사무총국 성원들은 사태해결을 위한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문제의 집행부 방침이 발표된 다음날인 12일에야 사무총국회의가 열렸고, 그나마 신뢰회복을 위한 지도부의 결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철저히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사업집행 담당자로서 지도부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것에 일말의 책임을 느낍니다. 따라서 현 집행부의 무책임을 대신 속죄하는 심정으로 민주노총을 사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또한 민주노조운동의 대의와 전통을 무너뜨리는 '비상식'의 대열에 결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민주노총은 우리가 청춘을 바쳤고, 우리의 피와 땀, 손때가 묻어 있는 곳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꿈이자 미래 그 자체인 민주노총을 떠나는 게 활동가로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원칙이 무너지는 상황에 순응하기보다는 감히 조직을 살리는 하나의 밀알이 되고자 합니다.
우리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무총국 활동가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뜻을 같이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민주노총의 대중적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는 일에 힘써 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끝으로 위기에 처한 민주노총을 살리기 위한 지도부의 결단을 거듭 촉구합니다.
2005년 10월 13일
국제부장 이창근, 기획차장 정은희, 대외협력국장 이황미, 비정규국장 차남호, 선전국장 황혜원, 정책국장 김태연, 조직국장 한선주, 조직부장 이승철, 총무부장 박인서, 편집부장 박승희, 편집차장 박수경, 편집차장 이정원, 쟁의국장 박선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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