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를 반대한다. 이 기사는 논쟁중
인터넷실명제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실명제를 반대한다.

 

공직선거법 제82조6에 의하면, 선거시기에 실명확인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인터넷 언론사에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그러나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는 국가가 인터넷 언론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검열이자, 익명성에 바탕한 표현의 자유와 여론 형성의 권리를 침해합니다. 정보인권 단체로서 진보넷은 선거시기에도 네티즌이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할 수 있도록, 실명제를 거부한 인터넷언론의 기사들을 미러링하고 그에 대한 덧글란을 선거기간 동안 운영합니다. 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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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어느 날, 석호필 덕분에

[이반의 세상, 세상의 이반] 떨리는 마음 : 커밍아웃하기

“석호필이 동성연애자구나. 몰랐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그녀가 무심결에 말을 내뱉었다. 석호필은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이름인 마이클 스코필드를 한국식으로 바꾼 애칭이다. 잠시 한가한 틈을 타 인터넷 기사들을 검색하던 그녀가 깜짝 놀라 말을 꺼낸 것이다.

순간 내 마음 속에는 회오리가 일었다. 아, 어떡하나. 저 낱말을 바로잡아주고 싶은데. 그런데 답답하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그저 가볍고 경쾌하게 지나가는 말처럼 지적할 수 있을까? 정색하고 얘기하면 나를 이상하게 보겠지? 내가 이 얘길 꺼내면 우리의 대화는 어디로 튈까? 차라리 커밍아웃을 할까? 그럴 것까진 없을까? 어떡하지?

귓전을 잡아끄는 ‘동성연애자’란 낱말, 그것이 그토록 갖은 질문들로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만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사진설명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와 ‘석호필’.

동성연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랍니다

한 십 초쯤 뜸을 들였을까, 용감하게 첫말을 떼었다. 한 낱말 한 낱말 발음하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지는 않은지, 좌불안석 신경 쓰면서.

“저기요, 동성연애자란 말은 안 쓰는 게 좋아요. 동성애자라고 하는 게 좋아요.”
“엥? 그거랑그거랑 뭐가 다른 거예요?”

잘 모르는 게 잘 아는 것보다 당연하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동성애와 관련된 양질의 정보가 충분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질문에 숨이 턱 막혀 온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쉬운 질문이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 반응에도 나는 감사했다.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한 격렬한 반감은 없으리라 짐작할 수 있으니까. 여담이지만, ‘질문하기’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대화의 방식 중 하나다. 좋은 질문은 소통의 틈새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던진 질문에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동성연애자라고 그러면 동성애자가 무슨, 항상 연애에 목매고 안달하는 것 같잖아요. ‘연애’ 하면 사람들은 ‘섹스’를 떠올리잖아요? 동성연애자라는 말에는 동성애자들이 섹스에만 정신팔고 사는 문란하고 불건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그대로 담겨있는 거죠. 이성교제는 이성교제고, 동성교제는 동성연애라는 거, 이거 좀 차별적이지 않나요?”

“아아, 난 또 그런 건 몰랐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동성연애자라는 말에는 동성애자는 나쁘다는 뜻이 들어있다 이거죠?”
“그렇죠, 그렇죠.”

워낙 성품이 따뜻한 그녀를 인간적으로 좋아해 왔는데, 낯선 이야기에도 스스럼없이 대꾸해 주니 한껏 고조됐던 긴장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도 동성애자인걸요

우리는 석호필이 게이(남성동성애자)냐 아니냐 하는 애초의 화제로 돌아왔다. 그 역할을 하는 배우가 게이라는 건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돼버린지라, 나는 그가 동성애자란 얘기가 예전부터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탄식했다.

“아니 우리는 어떡하라고 이렇게 잘 생긴 애들은 다 게이거나 여자가 있거나 그래?”

그녀의 얼굴에는 동의를 구하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이니까. 커밍아웃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대충 맞장구치면서 얼버무리고 말면 그만이기도 했지만, 그 날 그 순간 나의 내면은 신호를 보내왔다. ‘어서 똑바로 얘기해. 나는 그 󰡐우리󰡑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 용기를 내야 할 시점이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래, 하는 거야.

“히히, ‘우리’라고 하면 안 되는데.”
“잉? 뭔 소리야?”

그녀는 뒤따라 나올 내 말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나도 석호필처럼 동성애자거든요.”

제발 분위기가 싸해지지 말기를 이름 모를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모든 신을 다 찾고 싶었다. 신이시여, 저는 그녀와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을 해야 합니다. 부디…!

다행히 얼른 살핀 그녀의 얼굴은 싸늘하지 않았다. 다만 호기심으로 두 뺨에 홍조가 떠올랐을 뿐. 이제 긴장은 완전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말? 그렇단 말이에요?”
“네, 그래요. 헤헤.”
“와, 나 태어나서 처음 봐.”
“많이 봤을 걸요, 눈치를 못 채서 그렇지.”
“그랬겠네. 말하기 쉬운 게 아니니까.”
“그렇죠, 뭐.”
“이야, 신기하다.”

기뻤다. 동성애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속속들이 존재한다는 걸 설명 없이 전할 수 있어서. 이게 바로 커밍아웃의 위력이다. 나는 이름 모를 신에게 감사드렸다. 또 한 번 무사히 커밍아웃을 치를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늘 봐왔던 나를, 커밍아웃했다는 이유만으로 새삼 신기해하는 게 썩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점점 덜 신기해 할 테니 이 말은 그냥 지적하지 않고 패스.

일상에서 용기를 길어 올린다는 것은

동성애 관련 강의를 나가거나 인터뷰를 할 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강생이나 인터뷰어가 편견이 담긴 낱말을 쓰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차별적인 이야기를 쏟아 놓건, 나름대로 융통성 있게, 조리 있게, 사람 좋게 설명을 풀어낼 수 있었다. 활동가로서의 자의식 덕이다. 하지만 정작 내 일상에서 이런 상황을 맞부닥뜨리면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처럼 놀라고 허둥대기 일쑤였다.

사진설명레즈비언 후보라 밝히고 총선에 나섰던 최현숙 씨의 강연 모습.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강연과 일상은 또 다른 무게를 지닌 공간이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일상에서 동성애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얼굴 붉히고 흥분해서 어려운 말만 내뱉어 버리거나, 한없이 소심해져서 입 다물고 혼자 침울해지기도 했다. 내가 속한 공간에서 동성애 혐오 발언이 오갈 때도 파르르파르르 떨기만 할 뿐, 솜씨 좋게 대처하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다. 커밍아웃까지는 안하더라도 조목조목 또렷이 지적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게 꽂힐 시선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더 이상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며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해두었는데 이번에 조금 빛을 본 것 같다.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지만, 긴장의 밀도가 높았는지, 퇴근을 하고 나니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근무 시간 끝나기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라 천만 다행이었다. 아마 그 대화를 하고 하루 종일 그녀와 같이 있어야 했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이야기 꺼내길 더욱 주저했을 것이다. 뭐 별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긴장해야 하나 싶어 지치기도 했지만, 마구 ‘썰’을 풀기보다, 웃는 얼굴로 침착하게 잘 말했다는 데서 내가 더욱 용감해졌음을 느꼈다. 그러므로 나름 뿌듯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 뒤로도 그녀는 예전과 변함없이 나를 대한다. ‘비밀’이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 해 두었는데, 지켜 주길 기대해 본다.

그나저나, 활동가로 살아가면서, 자발적으로, 혹은 불가피하게 커밍아웃 해 볼 경험이 많은 나도 일상 속에서는 이렇게 힘들어하곤 하는데, 이반 친구 한 명 없이 고립돼 있는 레즈비언들은 오죽할까. 이 글에 적은 사례 같은 커밍아웃 에피소드는 무척 성공적인 사례에 속한다. 지극히 운 좋은 경우라는 거다. 여느 직장이라면 커밍아웃은 꿈도 못 꿀 일.

휴. 커밍아웃의 요령을, 커밍아웃을 감행하는데 필요한 용기를 더 많은 레즈비언들과, 성소수자들과 나누면 좋겠다. 나 혼자만 이상한 건 아닐까, 하고 겁먹은 채 두려워하고 있는 레즈비언들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 나누고 싶고 응원하고 싶다. 서로의 존재가 자기 긍정의 토대, 커밍아웃의 근거가 되니까. 우리, 만나요! 함께 해요!



덧붙이는 말

케이 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http://lsangdam.org)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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