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디부아르, 민중봉기로 구에이 장군 퇴임
「세계사회주의자웹사이트」 10/28 크리스 탈보트
야당 지도자들은 보이코트를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
다. 로랑 그바그보는 마직막 개표결과가 발표되지 않기는 했지만, 분명히
최다 득표를 했다. 선거에 출마하고 끝까지 남아있던 야당 후보, 그바그보
는 이제까지 대통령이 되면 "국가적 단결을 위한 거국적인 정부"를 세울
것을 약속해왔다.
논평가들은 구에이의 실각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의 사례에 이은, 민주적 민중봉기로 독재자를 처단한 또 다른 예로 평가하
고 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평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바그보의 지지자들은 구에이가 선관위를 폐쇄하고 자신은
선거당선자로 선언한 후에 저항을 벌였다.
기껏해야 수천의 비무장 시위대가 구에이 측의 군대를 상대하기는 어려
웠을 것이다. 이틀간의 폭동으로 약 30명이 총상으로 숨졌다. 그러나 저항
자들은 장다므리 부대-준군사적 경찰력-의 지지를 받았고, 곧 경찰의 지지
와 무기지원에 힘입어 군대를 공격했다. 갈등의 전환점은 포와 중기관총이
탑재된 네 대의 경찰장갑차가 수도의 TV방송국을 기습하여 여전히 구에이
측에 서있던 방어군을 제압했어야 한다. 을 때였다. 장다므리 부대는 그바
그보를 방송국 안으로 에스코트했고 그는 자신이 정권을 장악했다는 짧은
방송연설을 했다. 이때부터 점점 더 많은 군부대들이 입장을 바꿔 구에이
는 몇 시간 안에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과정의 배후에 프랑
스가 있다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코트디부아르에 주요한 경
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프랑스는 지난 7월 구에이의 대권야망에 반대
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파리당국은 1개 대대의 경
(輕)탱크 외인부대와 해안에 정박시킨 함선을 포함하여 550명의 병력을 주
둔시키고 있다. 이러한 군사력을 공개적으로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구
식민지 내정간섭이라는 비난을 받을 위험이 있으므로- 그러나 그것은 지역
세력에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워싱턴 포스트가 전한 바와 같이, "장
다므리 부대의 군대공격 결정은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전례가 없었다. 외교
관들에 따르면, 장다므리 부대의 지휘관이 코트디부아르의 전 식민지배자
인 프랑스와 가깝고, 프랑스가 최소한 그들이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도록
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사회당 정부와 로랑 그바그보의 코트디부아르 인민전선(FPI)
사이에는 마치 프랑스 사회당,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이 사회주의 인터
내셔널에 속해있는 것처럼, 공고한 연결관계가 있다. 사회당을 이끌고 있
는 미셸 로카르 의원은 한 연구소에서 구에이 정부가 전복되었고, "우리의
동지인 그바그보가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해서 따뜻한 박
수갈채를 받았다. 프랑스/코트디부아르 친선 그룹을 이끌고 있는 사회당
의원 앙리 엠마누엘리는 그바그보가 새 대통령이 된 것을 열렬히 지지하
며, "그바그보는 민주적 문화를 체득하고 있으며 절차적 민주주의
(functional democracy)를 수행할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프랑스가 그바그보를 지지하는 것과는 반대로 재선거와 헌법개정 요구가
미국에 의해 제기되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도 그에
동조하고 있다.
지난 7월 국민투표에 따라 대통령후보는 부모가 모두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그래서 구에이는 선거출
마 시점부터 알라산 오우타라가 부르키나파소 출신임을 주장함으로서, 그
의 숙적인 민주공화회의(RDR)의 대표 알라산 오우타라를 법정을 이용하여
배제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코트디부아르 민주당(PDCI)의 에밀 콩스탕
봄베를 포함한 몇몇 다른 후보자들을 배제시키는데 법정을 이용하였다. 코
트디부아르 민주당은 구에이에 의해 쫓겨난 대통령, 앙리 코난 베디에가
속한 당이며, 1960년 독립한 이래로 계속 집권당으로 존재해왔다. 전 IMF
사무관인 오우타라는 미국이 분명하게 선호하는 후보다. 1999년대 초반 코
트디부아르의 총리로 있을 때, 그는 엄격하게 자유시장정책과 정부지출 삭
감을 단행하였다.
프랑스는 재선거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파리와 워싱턴의 엇갈린 충고"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르몽드]지는 일요일의 선거가 그바그보에게 "필요
한 정당성"을 주었는지 물었고, 프랑스 정부에 대해서는 "지금은 선거에
대해 질문할 때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또한 그바그보의 등장으로
코트디부아르가 "혼란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외무장관 위베
르 베드린은 선거가 "코트디부아르의 법에 준거해서 이루어졌다는 의미에
서 합법적"이라고 주장했다. 오우타라가 선거에서 배제된 것은 코난 베디
에가 1990년대에 도입한 "코트디부아르인" 정책의 국수주의적 경향을 구에
이가 받아안아 발전시킨 결과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코코아 생산지로 코트디부아르는 서아프리카 경제의
중심으로 여겨져 왔다. 통화가 프랑스 프랑으로 묶여있기는 하지만 서아프
리카 CFA1) 지역 GDP의 절반에 달하는 생산을 자랑한다. 그러나 코코아 가
격의 하락과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결과로 경제가 무너졌으며, 빈곤과
실업이 증가하고 있다.
부르키나파소, 말리, 나이지리아와 다른 서아프리카국가들로부터 온 수
천명의 이주 노동자들은 수 십년 전에 코트디부아르로 이주해 와서 지금은
인구의 절반 가량을 구성하고 있다.
베디에와 다른 정치 지도자들은 "코트디부아르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
켜 왔다. "코트디부아르인"이란 코트디부아르 출신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
을 뜻한다-하지만 많은 부족들이 코트디부아르 국경을 넘어 넓은 지역에
걸쳐 퍼져있고, 코트디부아르 자체도 프랑스가 서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
고 멋대로 분할하여 생겨난 것이다-
베디에의 의도는 경제난의 해결책으로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부채질하
여 수 천명에 달하는 그들을 코트디부아르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
는 특히 오우타라를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이 우세한 북부지역에서 온 이슬
람교도라는 것으로 공격했다. -남부지역은 주로 기독교인들이 많다. 어떠
한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수 천명의 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은 오우타라가 친
IMF적 시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지금은 그를 지지하고 있다.
그바그보는 1970년대부터 노조지도자와 야당인사로서 오랜 명망을 가지
고 있으며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그는 코트
디부아르 국수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에 있어서 이
러한 측면은 프랑스 사회당 의원들의 말에서는 편리하게 잊혀졌다.
프랑스는 구에이가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었
다. 그의 반 이주민정책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코트디부아르 사회의 상층부
의 경쟁집단과 잘 지내지 못할 것이라는 능력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르
몽드]지는 그바그보가 인종주의적인 "코트디부아르인" 정책에 동조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바그보를 선택하는 것이 "차악(次惡)"이라는 프랑스
외무부의 소식통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겪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그것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우타라는 많은 코트디부아르 대중들
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
그바그보가 재선거는 없을 것이라는 발표를 한 후에 또 다른 충돌이 10
월26일 목요일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그바그보의 지지자들과 민주공화회의
측 시위대들 간의 갈등이었다. 수 천명의 그바그보의 코트디부아르 인민전
선 당원들은 다시 장다므리 부대를 등에 업고 오우타라의 집을 공격하였
다. 오우타라는 근처의 독일대사관으로 피신해있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적어도 20명 가량되는 오우타라의 지지자들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바그
보와 민주공화회의의 지도부는 자제를 호소하고 있으나,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적 불안정의 소용돌이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 La Communaute financiere de l'Afrique 아프리카 금융 공동체. 과거 프
랑스 식민지 국가들을 중심으로 14개 국가들이 공통화폐로서 프랑스 프랑
과 연동된 CFA 프랑을 채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