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를 반대한다. 이 기사는 논쟁중
인터넷실명제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실명제를 반대한다.

 

공직선거법 제82조6에 의하면, 선거시기에 실명확인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인터넷 언론사에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그러나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는 국가가 인터넷 언론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검열이자, 익명성에 바탕한 표현의 자유와 여론 형성의 권리를 침해합니다. 정보인권 단체로서 진보넷은 선거시기에도 네티즌이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할 수 있도록, 실명제를 거부한 인터넷언론의 기사들을 미러링하고 그에 대한 덧글란을 선거기간 동안 운영합니다. 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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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없는 거리, 일상적 시선의 두려움

길없는 거리, 일상적 시선의 두려움
porco russo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대안문화미디어모임 R.exe, porco@hanmail.net)


부메랑의 모순

'부메랑의 모순’이라고 할까?
기술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메랑'이다. 부메랑은 창이 가지고 있는 공격의 일회성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무기로서, 던진후에 되돌아오는 것을 다시 받아서 공격할 수 있는 반자동적인 무기이다. 멀리있는 대상을 반복해서 공격할 수 있는 '부메랑'은 도구의 혁신적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편리함의 이점은 항상 다른 여러 가지 난점을 끌어오게 된다. 먼저, 부메랑을 던진 이후, 이것이 되돌아오기 전까지는 공격이나 방어를 하기 힘들다. 또한, 부메랑은 대상을 공격하고 난 후, 던진 자신에게 칼날의 방향이 돌려진다.
인간은 대상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욱더 세게 부메랑을 던지며, 자신의 무방비상태인 시간을 최대한 줄여 공격에 대한 위험지수를 낮추려고 하지만, 동시에 부메랑을 세게 던지므로 해서 되돌려지는 회전력에 대한 위험지수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부메랑과 같은 사회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고 한다면, 부메랑의 자리에 좀 더 발달한 기술이 들어섰다는 것이고, 이제 이것이 단순히 도구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자체와 이의 수용에 대한 인간의 성찰은 더욱더 필요해진다.
인간의 성찰에 있어 필요한 전제가 되는 것은 기술이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자연의 법칙,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사회적 여건에 따라서 형성된다는 인식이다. (social shaping of technology). 고로, 기술의 적용에 앞서 수용과정을 필요로 하며, 수용되는 사회에 있어 광범위한 합의와 논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사회는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과연 되돌아 올 부메랑에 그대로 노출된 그런 사회는 아닌가?
이를 논의해보기 위해 나의 경험담을 몇 자 적고자 한다. 대학 2학년때 나는 노동절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밤샘을 하고, 잠시 맡게 된 친구의 가방을 짊어진 채로 장충단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공원앞에서 전투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게 되었다. 전경은 주민등록증도 없는데다, 다른 이의 가방을 가지고 있는 내가 의심스러웠는지 나의 양손 지문을 살펴보고 무전기에 뭐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내 열 손가락의 지문을 가리키는 부호를 무전기를 통해 중앙에 말하고, 중앙에선 내가 말한 신상명세를 지문의 부호와 맞춰보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서야 나는 풀려나게 되었다. 이 일은 주민등록증말고도 나의 신체에 새겨진 번호가 통제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경찰들이 검문하는 과정에서 나는 왜 나를 이들 앞에서 증명해야 하는가에 대해 한마디도 물을 수가 없었다.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고, 이들에게 나의 신상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간편하기 때문이었다.

기술수용의 '틀짓기'

우리는 왜 우리의 신상정보를 그대로 상납해버리는 걸까? 우리는 왜 이에 대해 조금도 분노하지 않는걸까?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출생신고를 마치며 주민번호를 발급받아야 했고, 국민학교에 반드시 다녀야 했으며, 19세에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아야만 했다. 왜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되는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지 않는 과정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주민번호를 쓴 것이 수십, 수백번이 지난 후에 나는 비로소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민등록번호를 발급하고, 이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게 됨으로써 모든 국민은 평생을 자신만의 고유번호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러한 시스템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일상문화들은 자신의 고유번호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국가에, 기업에, 상대방에게 공개할 수 있는 여건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는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회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되는 형국이 되어버렸고, 국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시스템이 더욱 더 확장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시스템은 일상문화를 등에 엎고, 여러 가지 기술적 조건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틀짓는' 효과를 발휘할 수가 있다. 특히, 개인정보의 수집과 통합, 유통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는 기술적 조건이 뒷받침되는 오늘날, 이를 이용한 통제와 관리는 국가차원을 넘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플라스틱 주민카드의 디지털자료들을 이용해, 경찰측에선 휴대용 사진 및 지문대조 조회기를 도입하려고 하고 있다. 또한, 경찰당국에선 모든 PC방의 IP주소를 작성해 달라고 주문했으며, 이에 대해 일부 PC방은 자신의 정보를 경찰에 넘겼다고 한다. 삼성은 자신들이 재단을 인수하고 있는 이점을 활용하여, 교수, 교직원, 학생들의 모든 정보들을 수집, 관리해 왔다고 한다. 이메일 도청, 휴대전화 감청 또한 예사로 일어나고 있다.
이제 나의 정보는 수집되어야 하는 범위와 대상을 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데이터에 나의 정보를 남기지 않을 수도 없다. 이제 거의 모든 거래와 일상은 이 데이터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보를 남기지 않을 수도, 그렇다고 정보를 남기고 편히 지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다.

길없는 거리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익명의 시민으로 비판할 수 없으며, 내가 읽고, 보고, 마시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감시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토준지(Junji Ito)의 표현을 빌려 이를 '길없는 거리'로 말하고 싶다. 그는 길없는 거리의 공포를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가족들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이모집을 향해 길을 떠난다. 집근처에 다다르게 되자,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 마을에선 모든 주민들이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이 마을에 언제부터인가 길의 방향이 모두 집과 집으로 좁혀지면서 집이 곧 마을의 통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길을 통해 목적지에 가야 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남의 집안을 거쳐서 갈 수밖에 없으며, 사적인 생활은 더 이상 보존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집주인은 자신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게 되고 가을 쓰게 되니 주위의 모든 이들을 불신하게 된다. 불신은 폭력을 낳게 되고, 사회의 기본이 되는 뿌리를 흔들어 놓게 된다.
길없는 거리가 말하는 것은 곧 사적 생활, 프라이버시의 소멸이다. 혼자 있을 권리가 없어지게 됨으로써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방해받거나, 해명해야할 필요가 있는 사회로 이전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일상적 감시의 시선을 느끼게 될 때, 자신의 생각과 표현에 엄청난 제약을 가지게 될 것이고,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틀짓기'에 대한 개입

근대적 틀짓기는 정보사회로의 이행에서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선 이미 마련되어 있는 데이터베이스, 이와함께 작동하는 일상적 권력과 너무나 쉽게 수용·합의되는 문화적 잔재들위에 새로운 틀이 지어지고 있다. 이러한 틀들은 길없는 거리를 지향하며, 조금씩 완성된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반공적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압력없이도 상업적 이데올로기나 도덕·윤리적 정치 투쟁에 의해 충분한 감시의 동력을 마련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틀지움에 대해 개입할 것인가? 무엇이 부메랑의 회전력이 가져오는 피해를 최소화시킬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바로 우리자신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틀에 대한 합의, 부메랑이 가지는 효용과 얼마만큼 던질 것인가의 합의는 바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길없는 거리로의 틀짓기, 특정방향에 대한 틀지움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해야 하며, 우리들이 지향해야 하는 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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