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를 반대한다. 이 기사는 논쟁중
인터넷실명제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실명제를 반대한다.

 

공직선거법 제82조6에 의하면, 선거시기에 실명확인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인터넷 언론사에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그러나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는 국가가 인터넷 언론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검열이자, 익명성에 바탕한 표현의 자유와 여론 형성의 권리를 침해합니다. 정보인권 단체로서 진보넷은 선거시기에도 네티즌이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할 수 있도록, 실명제를 거부한 인터넷언론의 기사들을 미러링하고 그에 대한 덧글란을 선거기간 동안 운영합니다. 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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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상황과 역사적 진단

[제5회 맑스코뮤날레 1차 워크숍] 한국진보운동에서 주체형성전략(1)

이명박 정권 등장이후 진보운동이 바닥을 쳤다는 평가는 일반적이다. 이에 진보운동의 재구성을 위한 일차적 과제로 주체형성전략을 꼽고 있지만 매우 지난한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지난 9월 17일 서강대에서는 제5회 맑스코뮤날레가 <주체형성전략>을 주제로 1차 워크숍을 개최했다. 민중언론 참세상에서는 이날 워크숍의 토론 내용을 3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이날 워크숍은 정병기(영남대)의 사회로 고민택(사노위),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심광현(문화과학), 이진경(수유너머 N), 장훈교(성공회대)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질문1 1987년 6.10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의 지배체제는 일정한 변화를 겪고 있다. 정치권력이 과거와 같은 경제권력 위에 서 있지 못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경제가 정치를 압도하고 국민국가가 과거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 80년대의 운동 또는 고전적 맑스주의로는 파악할 수 없는 현상들도 많다. 이런 변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이런 변화에 따라 맑스주의가 혁신해야 할 지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고민택(사노위)

자본의 지구화가 아무리 진전되고 상호연관성(동시성, 동조성)이 아무리 커졌다 해도,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이 국민국가 단위로 구성되며 그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즉 자본주의 체제에서 세계국가 또는 세계정부는 성립할 수 없다. 또한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제국 또는 글로벌 거버넌스가 독자적으로 형성될 가능성도 없다. 자본주의는 그 생명을 다할 때까지 국가간 경쟁, 대립, 갈등을 피할 수 없으며 자본의 위기가 커질수록 그 정도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의 실천적 귀결은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로 ‘국가의 민주화’나, ‘국가의 공적 역할 강조’로 나타나게 되고 결국 ‘시장과 국가’ 사이에서의 진자운동을 벗어나기 어렵게 할 뿐이다. ‘경제가 정치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와 정치를 허구적으로 분리한 이데올로기가 폭로되고 있으며 오히려 경제와 정치의 유착 관계가 적나라하게 또는 투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국민국가는 노골적/일방적으로 자본의 편에 서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자본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국가를 압박하는 것은 또 다른 국민국가, 즉 제국주의다.

한국은 물론 오늘의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고전적 맑스주의’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근거는 달리 없다. ‘고전적 맑스주의’가 세계의 모든 현상을 일일이 일대일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고전적 맑스주의’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맑스주의 혁신’도 하나의 언어가 아니다. ‘맑스주의’에 대한 이해나 전제를 확인/소통하지 않은 채 ‘혁신’을 보편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마르크스주의는 다양하게 분출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의 지도이념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혁신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계급관계로 잡히지 않는 이런 다양한 가치를 받아들여서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할 것인지(이런 노력들도 경주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의 변종 이념들도 외국에서 직수입되고 있다) 아니면 마르크스주의를 상대화하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들의 이념과 이론과 병렬로 연결해야 할 것인지는 고민되는 지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변혁론을 재점검하고 한국사회의 계급구성, 변혁주체를 밝혀야 하고, 변혁의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대중 설득력을 갖지 못할 때 마르크스주의는 진보운동 주체들이 아무리 한사코 붙들고 싶어도 외면당하거나 현실적인 힘이 되지 못한다.


심광현(문화과학)

오늘의 한국 맑스주의가 처한 주요 난관은 ‘87년 체제’와 ‘97년 체제’의 이질성과 상호작용, 97년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및 그 위기)와 맞물린 경제적-문화적 양극화와 연동된, 계급모순과 비계급 모순, 적대와 차이의 변증법의 중층결정을 파악하는 데에서의 어려움, 그리고 그 과정에 적합한 이론적-실천적 과제 설정과 해결에 실패해 왔던 점과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곧 구조와 행위, 적대와 차이의 변증법을 간과함으로써 복잡하게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적극적인 대중운동과 대중정치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 형성의 방법과 기반을 형성하지 못해 왔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세계적 차원에서 ‘이행’이 시작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그간 다양하게 ‘치환’되었던 모순들이 조만간 새롭게 ‘응축’할 것으로 예상되는 바, 과거의 한계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 새로운 주체형성의 이론적 프레임을 구성하고, 미시적 생활정치와 대중정치의 차원에서 새로운 실천의 길을 터나갈 구체적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진경(수유너머N)

‘전지구화’가 레닌적인 의미의 제국주의 체제를 뛰어넘었다고 하든 그렇지 않다고 하든, 국경을 넘는 자본의 착취와 수탈에서 국민국가의 매개적 위상을 현저히 약화시켰음은 부정할 수 없다고 보인다. 자본은 국민국가의 매개를 가능한 한 줄이면서 직접적으로 다른 영토들에 드나들며 착취하려 하고 있고, 국민적 경계의 ‘보호장벽’은 점차적으로 무력화되고 있다.

노동력의 흐름 역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한편에선 소위 ‘고급노동력’의 흐름이 국민국가의 벽을 쉽게 넘나들며 ‘전지구화’되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선 국민국가적 차이를 정치적 및 경제적, 사회적 차별로 변환시키는 국가적 절단장치로 인해 소위 ‘저급노동력’의 새로운 회로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노동력의 흐름이 상반되는 두 개의 흐름으로 층류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민국가적 분절을 전제로 하고 있던 노동자계급의 정의에 대해 근본에서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닐까? 나아가 역시 국민국가적 형태로 조직되고 전개되어왔던 노동운동의 양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뜻하는 게 아닐까?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조직화 자체가 처음부터 국민적 경계를 횡단해야 함을 뜻하는 게 아닐까?

세 번째는 대중의 변화와 관련된 것이다. 이른바 ‘정보통신혁명’으로 인해 전세계를 연결하는 인터넷은 대중의 존재양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대중이란 본래 주어진 자리, 정해진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들의 흐름을 통해 정의된다. 특히 한국은 2002년 이후 놀라운 속도로,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대중의 형성을 빈번하게 예시해 준 바 있다. ‘전위조직’이 있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있다고 해도 그들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정당을 비롯한 다른 종류의 정치적 조직에 의해서도, 시민운동에 의해서도 통제되지 않는 대중이 정치의 새로운 일차적 조건이 되고 있다. 이는 고전적인 맑스주의에서 매우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개념이면서도, 고전적인 방식으로는 적절하게 다루지 어려운, 다시 말해 고전적 맑스주의를 혁신해야 할 지점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장훈교(성공회대)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적인 발전경로가 상이하기 때문에,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의 전형을 설정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다. 단지 여기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단계가 ‘시민’의 등장이 아니라 동시에 ‘비시민’의 폭발이라는 상황으로 귀결되는 상황이라고 임시적으로 정의한 이후에, 이 상황을 마르크스주의와 연결하여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사회를 박탈당한 존재로서의 비시민은 “사회적 삶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개인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내부에 ‘삶의 위기’와 ‘체제(혹은 구조)의 위기’를 연결하여 사유하는 과정에 여전히 지속적인 긴장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삶의 위기에 대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개념은 ‘착취’(exploitation)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의 위치를 사회로부터 박탈당한, 측 착취 받을 기회를 상실한 개인들에게 착취의 개념은 삶의 위기를 해명하는 주요 개념으로 작동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내재된 동요하는 두 개의 지평 즉 경제적 착취와 인간의 소외의 특정한 형태로서의 ‘무시’와는 결을 달리하는 문제로서 현재의 삶의 위기를 구조와 연결해서 사유할 필요성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마르크스에게는 삶의 실패를 인간의 능력의 박탈로 정의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능력을 특정한 실패로 귀결 짓는 현재의 사회성의 구조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회성의 양식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능력’에 대한 사유가 마르크스주의의 내부로 깊이 진입하고 있고,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다.


질문2 이런 변화는 지배 권력의 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1996-1997년 총파업 투쟁 이후 한국진보운동에서 노동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 이것은 변혁 주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오늘날 변혁은 새로운 주체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민운동이나 세대변동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만일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대안적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고민택(사노위)

변혁 주체 문제는 존재론적 접근과 구성(형성)론적 관점을 통일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노동의 형태와 계급의 구성이 비교적 단순했던 시기에는 존재 자체에 상당 정도로 구성(형성)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에 반해 오늘날처럼 노동의 형태가 비약적으로 다양화되고 노동계급이 수많은 층위로 구성되어 있는 시기에는 훨씬 더 구성(형성)론적 측면을 의식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해체 또는 개별화하고, 즉 탈계급(주체)화한 상태에서 새로운 주체를 찾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노동계급 전체가 프롤레타리아는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의 핵심(중심) 부대가 노동계급 속에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변혁 주체를 ‘게토화’된 존재에서 찾거나, ‘다중(지성)’으로 대체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해왔다는 판단도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지금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변혁 주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거나 ‘새로운 주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처지/상태에 놓여 있는 노동운동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것인가를 말해야 한다.

시민운동이나 세대변동 문제는 미시적 차원에서는 검토해야겠지만 그것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는 보지 않는다. 따라서 주체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도 대안적 주체를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판단이다. 오히려 대안적 정치, 대안적 실천이 절실하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한국진보운동에서 학생이 선도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시기에서 노동조합운동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시기가 있었으나, 이제는 학생운동은 역량을 소진한 뒤에 명맥만 유지해가는 상황이고,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계급 구성의 다양화로 인한 이해관계의 분화로 인해 계급 내부의 단결부터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아직은 충분한 흐름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한국진보운동은 새로운 변혁의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기존의 변혁의 주체로 보았던 노동자들이 변혁의 중심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 노동자계급 중에 계급의식을 갖고 사회변혁적 관점을 가진 일부의 노동자들만이 변혁의 주체일 것이다.

시민운동과 관련해서 노동운동이 시민운동을 선도하는 역할은 전혀 못하고 있고, 기대하기도 힘들다. 사회적 의제를 세팅하는 데에는 시민운동이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시민운동이 세팅하는 의제를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이 따라가는 격인데, 이러다 보니 운동의 주도성을 상실한다.

우리는 2008년 거대한 촛불의 힘을 보았다. 거리에 나와서 대오를 형성했던 촛불시민들은 노동자계급이 아니었고, 노동운동이 그 중심에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노동운동을 비롯해서 진보운동을 주도하던 세력들이 촛불시민들에게 외면을 당했다. 아직은 분명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거리에 나왔던 촛불시민들이 누구이며, 어떤 경로로 거리로 나올 수 있었는가에 대한 분명한 분석에 기초해서 변혁의 주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변혁의 주체는 이론적으로 노동자나 민중이라는 언설은 하나마나한 말이다.

구체적으로 현실의 변혁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민중들이라면 그들이 변혁의 주체로 되기에는 부족하다. 지금의 시대에서 정치적인 각성을 갖춘 대중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힘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로 시선이 옮겨져야 한다. 물론 노동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운동을 넘는 새로운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심광현(문화과학)

1996~1997 총파업 투쟁은 동구권 붕괴 이후 진보적 대중운동의 해체 및 침체 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호기였지만 그 잠재력은 IMF에 의한 구조조정에 의해 신속히 억제되었고, 이후 노동운동은 ‘구조조정 반대’라는 수동적 투쟁에 위치로 내몰리면서 ‘조합주의’의 좁은 틀 내로 후퇴해 왔고, 나아가 노동현장 내부에서도 정규직-비정규의 분화를 극복할 수 없게 더 좁은 위치로 뒷걸음질 치는 지속적 협애화 상태에 빠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원인으로 90년대 이후 급속한 세대변화가 일정하게 노동운동의 확대 재생산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을 들 수도 있겠으나, 보다 심층적인 원인은 민주노총 출범 이후 노동운동의 주력과 기조가 대공장 정규직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끌려 왔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는 곧 IMF 위기 이후 노동운동의 주된 관심은 구조적 모순의 심화와 사회적 갈등의 다양화로 인한 사회 변동 과정 전반에 대한 진보적 개입과 투쟁의 마당으로부터 공장 안으로 전선을 후퇴시켜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오늘 한국의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은 더 이상 스스로를 변혁운동의 주체로 ‘호명’해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다른 한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도 개별-분산-고립화되어 있어 사정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을 젊은 세대의 탈정치화나 개인주의 및 90년대 후반 이후 성장한 시민운동에서 찾으려는 것은 심정적으로는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 합리적 진단은 아니다.


이진경(수유너머N)

1997년은 외환위기가 발생한 시기이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시기이며, 동시에 위환위기를 빌미로 파견노동을 자유화함으로써 비정규직 노동자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리고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확대를 ‘받아들여준’ 시기이기도 하고, 제도적 합법성을 얻으면서 노사정 위원회에 들어가 거버넌스의 한 축이 되었던 시기로 기억된다. 87년 대투쟁 이후 적어도 대기업에 관한 한 임금율이 상승하여 그것이 새로운 노동자의 생활조건으로 구체화된 시기기도 한 것 같다. 이는 노동자 내부에 상반되는 두 개의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 같은데, 아마도 2000년 한국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러한 두 개의 길이 현행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계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후 노동운동은 물론 노동자 계급 자체가 두 개의 다른 부분으로 ‘분해’되어 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및 조직화되고 제도적 안정성을 갖는 노동자들과 비정규직이나 ‘외국인 노동자’처럼 노동자의 지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노동자들이 그것이다. 한국의 조직화된 노동운동이 전자에 기초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조직화된 노동운동은 그 힘을 상실해 갈 가능성을 갖는 것 같다. 그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전투적인 노동운동이나 타인들의 이익을 위한 투쟁에 나서지 않으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나 ‘외국인’ 노동자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계급 자체에 대해서도 신뢰와 리더십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민주노총’은 이런 길을 충실히 걸어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대기업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심지어 그들의 이름으로 싸우려고 할 때조차, 총파업은 많은 경우 부도수표가 되었으며, 그것 이외의 투쟁방법을 별로 알지 못하기에 가능성이 없으면서도 다시 ‘총파업’을 선언하고 결국 또 무산되어 무력화되는 일이 적지않이 반복되어 왔다고 기억된다.

이것이 변혁주체의 변화를 뜻하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노동자계급 내부에서의 또 다른 계급분화가, 단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객관적’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노동자의 변화가 노동운동의 변화라고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모든 노동조합운동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적인 운동이기에, 그것만으로는 변혁운동의 주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은 맑스주의의 상식이다.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운동의 방향과 새로운 활력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지금 조직된 노동운동이 변혁운동의 주체가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장훈교(성공회대)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을 전교조운동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유사성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두 운동이 사회 전체로부터 조합원의 협소한 이해관계에 치중하면서 자신의 운동을 스스로 배반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전교조운동 또한 민주노조운동의 일부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인다면 여기에서 자신의 운동을 배반하고 있다는 주장의 근원지는 자본과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 일반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좌파와 진보진영 내부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형태의 비판들이 존재한다. 이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러한 주장들이 사회적인 동의를 확보할 수 있었던 사회구성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동의는 자본과 국가의 헤게모니적인 개입에 의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개입이 둘러싸고 있는 실질적인 사회구성의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1) 조합의 구성원이 될 수 없는 다수의 사회현실을 반영한다. (2) 또한 조합의 이해관계와 사회의 이해관계가 분리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주지하다시피 노동조합운동이나 혹은 노동운동 그 자체에 대한 검토보다 우선적으로 변화된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반에 대한 검토를 요청한다.


질문3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의 시민운동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관련되어 있기도 한데, 어떤 사람들은 시민운동을 신자유주의의 다른 한쪽 날개로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특히, 과거 시민사회에 대한 평가는 한국의 봉건적 유제 또는 국가의 비대화와 관련하여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의 시민운동에 대해 평가해 달라.


고민택(사노위)

한국의 운동 지형에서 ‘반신자유주의’는 적어도 ‘정치적 구호, 정치적 수사’ 차원에서는 공동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적용을 둘러싸고는 사안별로 쟁점 형성이 끊이질 않고 있다. 그 원인은 ‘반신자유주의’ 자체를 보는 것에서의 차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반자본주의’의 수용 여부가 다르다는 것에 있다. 특히 시민운동은 ‘반신자유주의’를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입지와 역할을 유지하기 위한 차원에서 대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소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한 날개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시민운동은 서구의 ‘신사회운동’과 비교할 때조차도 한참 뒤떨어져 있다. 급진민주주의적 요소도 전혀 표출되고 있지 않으며, 자본이나 정권으로부터 독립적인 운동 형태도 유지하고 있지 못한 상태다. 또한 한국의 시민운동은 하다못해 진보정당운동에 대해서마저도 거리를 두고 있는 바 그 이유가 부르주아 야당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 때문이다. 물론 이 범주에 ‘좌파적’ 인권운동, 여성운동, 생태운동, 문화운동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시민운동’ 범주가 아닌 ‘사회운동’ 범주로 구별되어야 하며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시민운동은 기존의 민중운동과 선을 그으면서 출발했다. 그런 차별화 전략은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자유주의세력이 집권한 지난 10년 동안에는 시민운동이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아스팔트 농사는 민중운동이 다 짓고, 성과는 시민운동이 다 차지한다는 자조적인 평가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향과 이념을 일정 정도 공유하던 자유주의 세력이 정권을 내놓자마자 시민운동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감소했다.

시민운동은 정책생산능력이나 의제의 세팅에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의 힘에 근거한 운동을 외면하다보니 운동성이 현저하게 퇴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 체제의 변혁보다는 현 체제의 합리적 안정화에 기여하는 역할을 한 것이 정책대안자로서 시민운동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고, 이를 압도할 만한 진보운동진영의 실력이 모자랐음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시민운동이 관성을 벗어나서 대중들의 조직된 힘을 인식하고, 풀뿌리운동과 연계하여 운동의 토대를 다지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모습이다. 이런 점들은 오히려 진보운동진영이 수용해야 할 모습이다.

왜 시민운동이 제기하는 운동은 되는데, 민중운동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외면당하기 일쑤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 때다. 시민운동에 대한 선 긋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의 운동전략과 대중을 동원하는 방식은 진보운동진영이 오히려 배워야 할 부분이다. 그에 비해서 진보운동은 구태의연한 관성에 빠져 있거나 지나치게 정파중심적으로 움직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음도 의미 있게 되새겨야 한다.


심광현(문화과학)

IMF 위기 이후 시민운동의 지속적인 성장은 87년 이후 대중운동의 주력이었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후퇴로 인해 텅 비게 된 공론장과 사회적 공간을 다양한 프로그램과 현실적 정책 제안으로 꾸준히 채워온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국가와 기업의 비민주적 관행을 일상적으로 감시하여 법률과 국가정책과 공공 부문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대시켜 왔고, 환경오염과 생태파괴를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생활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면서 도시공간과 교통, 시민들의 의식과 생활양식을 상당 부분 친환경적으로 변화시켜 온 것은 시민운동의 주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중산층 시민들의 재정 후원에 기반 한 시민운동의 주력은 ‘87년 체제’로 개방된 정치적 공간의 민주화와 생활세계의 합리화에 주력했을 뿐, ‘97년 체제’로 인해 가속화된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계급모순의 심화라는 구조적 심각성에 대해서는 대개 외면해 왔을 뿐 아니라, 전자의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그 이면에서 ‘87년 체제’를 ‘97년 체제’의 하위 수단으로 변질시켜 왔던 과정을 묵인-방조-참여해 왔다는 점에서 ‘신자유의의 다른 날개’(2중대)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시민운동이 그간 일정하게 성과를 이루어 낸 절차적 민주주의와 공공 부문의 개선된 성과들이 ‘MB 정부’에 의해 무참하게 해체되고, 경제적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자 여러 면에서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세계 대공황을 맞아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이 시작되고 있는 오늘날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거시적 대차대조표의 이처럼 초라한 성적표이다. 87년 이후 가장 큰 규모로 100일 이상 지속된 2008년 ’촛불항쟁‘에서 자발적 시위 대중(다중)들이 기존의 모든 사회운동단체들과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던 이유도 이 대차대조표의 초라한 성적과 무관치 않다.


이진경(수유너머N)

시민운동이 시민사회 체제의 일부분, 더구나 요즘처럼 ‘거버넌스’가 중요한 통치전략이 되고 있는 시대에는 거버넌스의 일부분이 될 위험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가령 정당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회당이나 노동당, 혹은 ‘공산당’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한쪽 날개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노동운동 또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시민운동들이 있는 것이고, 시민운동마다 다른 의미와 가치, 효과가 있는 것이며, 하나의 시민운동단체조차 때에 따라 진보적인 경우도 있고 반동적인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의 ‘시민운동’을 하나로 묶어서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할 뿐 아니라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시민운동이 민주주의와는 반대되는 정치적 요소에 대한 비판, 국가의 비대화에 대한 비판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 국가의 비대화를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한쪽 날개라고 보는 것일까? 그러나 국가에 대한 비판, 국가화에 대한 비판을 곧바로 그렇게 등치할 순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신자유유주의가 개인의 경쟁을 강조하고, 모든 것을 개인의 부담으로 되돌리려는 체제임을 생각한다면, 시민운동이 신자유주의의 한쪽 날개라는 평가라는 말은,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설득력이 없다고 보인다.


장훈교(성공회대)

노동운동과 마찬가지이지만 시민사회운동 일반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다.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오래된 이분법 때문에 노동운동에 대한 논의는 계급중심성에 대한 문제로 국한되고,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논의는 탈계급성에 대한 문제로 국한되는 오래된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것이 시민사회운동의 주요한 사회적 기반이 중간계급-지식인-전문가라는 사실과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멸사봉공과 같은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한국의 역사에서 국가에 대한 반성능력을 가진 시민의 발생과 시민들의 연대에 기초한 공간으로서의 시민사회가 발생한 것은 그 자체로 긍정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의 효과로 발생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진보적 시민사회라고 일반적으로 총칭하는 대상은 (1) 국가에 대한 반성능력을 가진 시민에 기초한 (2) 민주화운동와 민주주의의 효과와 결합되어 있는 사회를 지칭하지만 이와 동시에 혹은 이에 대한 보수적 반동으로서 국민공동체를 강조하는 하지만 이전의 관변단체와는 다른 형태의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 1997년 이후의 주요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민사회를 ‘보수적 시민사회’라고 부른다면 이 집단의 주요 특징은 국가로의 재통합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경험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본주의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 없는 역사적 특징이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문제는 다르게 말하면 이러한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한계를 시민사회가 공유하고 있다는 지적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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