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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의 관이 영결식장을 빠져나갈 때, 사람들의 입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터져 나왔다. 한반도의 아픔, 민중의 아픔으로 한 평생을 고민했던 리영희 선생은 사람들의 노래를 들으며 떠났다. 이승에서 그의 마지막 도착지는 망월동 묘지. 생전의 바램대로,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열사들과 함께 묻히게 됐다. 열사들과 리영희 선생이 함께 눕게 될 망월동 묘지에서는 벌써부터 혼령들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들린다. 그들은 오늘도 산자들을 향해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고 이야기 한다.
8일 오전 7시,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장에서는 마지막으로 리영희 선생을 기리는 영결식이 열렸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 생전에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어둑하고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맞으며 영결식장에 모여들었다. 추도사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며, 또 기도를 하며 그들은 리영희 선생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그들은 비록 ‘실천하는 지성’을 잃었지만, 그가 살아생전 남긴 많은 유산들을 기억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 실천을 받아 안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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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모두 사는 날까지 선생님이 그러하셨듯 ‘인간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반인간중심적 가치관을 제압하기 위해 스스로 ‘의식화’하고 이웃도 의식화하면서 나날이 깨어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선생님께서 저희에게 거시는 희망이며 엄중한 지침으로 들립니다.”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훈훈해지고, 팔다리에 힘이 불끈 솟구치게 하던 리영희 선생님. 이제 당신 평생 짊어졌던 그 모든 무거운 짐을 남은 우리들에게 내려놓고 깊이 영면하소서”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은 추도사를 통해 리영희 선생의 실천적 지성으로 새 세상을 열어보겠노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추도사가 이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연신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서 겪어왔던 고난과 가난, 그리고 핍박을 알고 있어서다. 그가 남긴 유산은 너무나 크지만, 그 유산을 남길 때까지의 그의 아픔과 고난 역시 컸다.
다섯 번의 구속과 반복적인 해직과 복직은 그에게 굴곡적인 삶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성을 버리지 않았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등의 저서를 발표했고, 한반도와 함께한 그의 삶과 사상을 담은 자전적 대담도 남겼다. 민중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사상을 전달하고 방향을 이야기 했다. 때문에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의 올곧음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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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결코 맷집 좋은 투사가 아니었고, 우스개 잘하고 벗들과 놀기 좋아하며 다정다감하고 때로는 턱없이 천진한 자유인이었습니다. 단지 거짓과 속박과 폭력을 뼛속까지 싫어했고 거기에 눈 감고 입 다물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온갖 싸움에 시달리고 자유생활을 박탈당하기도 하셨습니다만, 싸움은 언제나 마지못한 싸움이요 빼앗긴 것은 누구 못지 않게 즐길 줄 아는 생활이었기에 당신의 헌신이 더욱 값졌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당신의 목소리가 더욱 심금을 울릴 수 있었습니다.” -백낙청 교수의 추도사 中
기상청은 새벽부터 눈이 올 것이라 예보했지만, 그의 관이 영결식장을 빠져나올 때 까지 하늘에는 희뿌연 안개만 가득했다. 흰 함박눈은 그가 광주 망월동 묘지로 향하는 동안 흩뿌려질까. 팔십 평생 새 세상을 염원했던 ‘사상의 은사’는 망월동 묘지에서부터 다시 실천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실천의 재구성은 남겨진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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