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를 반대한다. 이 기사는 논쟁중
인터넷실명제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실명제를 반대한다.

 

공직선거법 제82조6에 의하면, 선거시기에 실명확인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인터넷 언론사에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그러나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는 국가가 인터넷 언론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검열이자, 익명성에 바탕한 표현의 자유와 여론 형성의 권리를 침해합니다. 정보인권 단체로서 진보넷은 선거시기에도 네티즌이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할 수 있도록, 실명제를 거부한 인터넷언론의 기사들을 미러링하고 그에 대한 덧글란을 선거기간 동안 운영합니다. 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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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윤미의 인권이야기] 지적장애아동을 만나다

나는 방송다큐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연출부에서도 조연출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온갖 업무에 시달리긴 하지만 오직 작품에만 몰입해야 하는 위치는 아닌지라 제작 과정을 객관적인 위치에서 볼 수 있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단 한 마디라도 섞게 되는 게 이 직업이다. 그 과정이 보람되기도 하지만 불편해지는 경우도 많다. 방송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의 한계, 오가는 말들 속에 마음에 걸리는 어떤 언어들, 이것 아닌 다른 방향 혹은 전혀 새로운 방향에 대한 갈망. 생각이 참 많아진다. 아직 생각이 많다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 내 인권이야기에서는 방송을 통해 만나는 사람과 그 과정에서의 고민을 이야기 해보고 싶다.

엄마라는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

요즘 어린이 희귀병에 관한 방송을 만들고 있다. 그런 사례를 찾아 촬영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복지원에서 만난 지적장애아동이다. 선천적인 유전병 때문에 지능이 낮아진 건데, 조기에 발견해서 식사요법이나 약을 잘 먹었더라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었던 거라고 했다. 그 아이는 지금 엄마라는 말도 하지 못한다. 어떤 사정이었는지 부모들이 일찍이 아이를 그곳에 맡겼다고 했다. 그렇게 자라 16살이 되었다.

많이 움츠려 있어 어디 아픈 건가 싶긴 하지만 외모는 그냥 그 또래의 남학생이다. 남동생 생각이 나선지 마음이 많이 쓰였다. 촬영을 끝내고 돌아와서도 문득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럴 때마다 하염없이 들었던 생각은 “이 친구가 정상적으로 자랐다면 살 수 있었을 평범한 삶”이었다. 그랬다면 느낄 수 있었을 세상, 할 수 있었을 활동. 상상할수록 마음이 쿡쿡 쑤시는데, 대책 없는 연민이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생각해버리는 정상적인 삶이란 뭔가. 말을 하고 들을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대충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삶 말이다. 그래서 내 연민이 싫었다. 과연 내가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길 자격이 있는 건가 싶은 의문. 아무래도 불행할 거라는 짐작 때문일 텐데, 과연 내가 그의 행불행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건가. 내가 알고 있는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뭔가. 이 사회에서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은 너무 적지 않은가. 그리하여 만들어내는 것도 너무 빤하지 않은가.

어쨌든 이 친구는, 제 때에 치료하지 못 해서 뇌 기능이 떨어진 하나의 ‘사례’였다. 같은 유전병을 앓지만 조기에 치료를 받아서 정상적으로 자란 아이와는 비교가 될 터였다. 방송 주제에는 적합했다. 조기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할 수 있는 중요한 이미지였다. 이 아이는 분명 편집을 통해 가엾고 안타까운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건, 이 아이가 ‘정상적’이라고 하는 아이와 비교되어 불행하게 비춰지는 것이었다. 그 죄책감이 컸다. 나 역시 떨치려 해도 잘 되지 않는 그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으니까.

사진설명[그림: 윤필]

소통하기 어렵다는 변명

다른 어떤 장애보다 지적 장애에 마음이 쓰였던 건, 너와 내가 소통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었다. 공통감을 나눌 수 없다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아니 착각. 아무래도 변명. 우린 이 사람이 지적 장애라고 들으면 너와 나는 소통하기 어렵다고 단정 지어 버리게 된다. 아니면 긴 시간과 지난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린 쉽게 게을러진다. (여기서의 ‘우리’ 역시 구별 짓고 있는 내가 보인다)

그토록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소통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상적이라는 말만큼이나 참 쉬운 것 같다. 언어라는 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통해 하는 것, 이게 소통에 관한 우리의 습관적인 생각이다. 그게 소통의 한계일 거다. 언어로 둘러싸인 세계를 잘 인지할 수 없고 언어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 하는 그 친구는, 그래서 지적 장애라 불린다. 그런데, 정말 소통이란 무엇인가. 그건 그저 ‘정상적인’ 소통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서툴렀다. 분명 그를 촬영하러 갔지만 정작 그는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교감하고 싶어도 어찌해야 할 지 아무도 몰랐다. 물건 찍듯, 짧은 시간 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란 저마다의 짐작으로 최대한 필요한 것만 찍고 마무리했다. 각자 마음에 어떤 꿈틀거림이 있었을 테지만 그저 손 한 번 만져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그 날의 내 고민을 말하자 친구는 말했다. 한없이 가여워하는 내 태도부터 바꾸라고. 특히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가능했을 무언가’를 생각하는 건 실례라고 말이다. 중요한 건 현재라고, 그 사람이 더 잘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이라고 했다. 덧붙여 해준 말이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의 행복함이 나타나는 지점이 다양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그걸 균질화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정말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며 그 사람의 현재를 부정하거나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현재를 살필 것. 나 역시 내 장애를 헤아릴 것. 그리하여 서로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고민하고 도모할 것. 무엇보다 내가 하는 판단들이 어떤 기준에 의한 것인지를, 쉽게 하는 생각 끝에 꼭 물려 생각하기. 우리가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들이 얼마나 쉬운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고민하지 않으면 결국 그 틀에 얽매이는 건 나일 거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지점이 훨씬 다양해지면 좋겠다.

아이가 씩 웃었다

내가 정상이라서 안주하고 싶지도, 비정상의 상태에 놓였을 때 안타까움의 시선을 받고 싶지도 않다. 나라는 사람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이 정상이라거나 비정상이라고 규정받고 싶지 않다. 그 경계를 지워버리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안다. 그렇게 노력해야 정상적인 소통에서 조금씩 움직거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말을 걸고 싶은데 도무지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잠깐 짬이 나자 슬쩍 그 아이의 발에 내 발을 갖다 댔다. ‘와 너 발 되게 작구나.’ 잘 들리지도 않게 웅얼거렸는데 그 아이가 씩 웃었다. 그 미소 때문에 더더욱 마음이 쓰였던 것 같다. 다시 그 친구를 본다면, 나는 좀 다른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주저하거나 거리끼지 않는 편안한, 그런 인사를 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말

윤미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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