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명성황후” 연출자인 윤호진 씨가 총감독한 25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은 31억 원이 책정된 대형 쇼였다. 재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고 헤겔이 지적했듯 언론들의 보도를 보면 이날 취임식은 박근혜를 이미 “희망과 행복을 주는 대통령”으로 만든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은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국립현충원, 국회 그리고 광화문으로 이어지며 인간 박근혜의 이미지 서사와 앞으로 그가 행할 정치를 재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이 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성공 신화 -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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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녹색 “뼁끼”를 칠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다르게 박근혜 대통령의 검은 차량 행렬은 단출한 삼청동 자택 앞길로부터 출발한다. 국립현충원을 지나 그의 차량은 세계적 성공을 거둔 K-POP과 한국의 대중문화를 연대별로 조명한 마지막 무대, 싸이의 무대 뒤에 배치되며 “대중성”과 “세계성”을 동시에 띠는 성공 그 다음의 무대에 놓인다. 이러한 전개는 박근혜 정부가 성공과 발전의 길에 서 있다는 암시며 이전 이명박 정부에게도 면죄부를 주는 장치다.
이러한 연출은 박근혜가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했고 역경을 이겨냈다는 방송멘트와 함께 이어졌다. 그람시까지 동원됐듯 성공한 이유로 평가된 것은 어려운 기간을 “인내”했다는 것이 전부다. 아, 저렇게 성공하기 위해선 인내해야 하는구나!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아버지 깔대기
취임식은 이러한 고전적인 성공 신화와 함께 군부독재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도록 한다. 한편에서는 “제2의 한강의 기적”, 파독간호사 초대 등을 통해 “역경 속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박정희를 떠올리게 하며 또 한편에서는 박근혜와 박정희를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만 보도록 한다.
특히 주민들이 “동네 주민”이었던 박근혜에게 전달한 진돗개 두 마리는 박정희와 육영수와의 기억을 박근혜의 사적 기억 안에, 그러니까 딸로서의 기억으로 반추하도록 하는 정치적 효과를 낳는다. 대선 전 불거진 역사인식 논란에 대해 박정희를 언급하며 “아버지”를 보내주자고 말한 박근혜의 부탁과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박정희를 그의 딸인 박근혜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요구 받는다.
디바들의 합창...여성대통령 아래 여성들도 행복할 수 있을까
“아리랑 판타지”를 부른 여성 가수 4명의 무대는 성공한 여성이자 여성적 구원자로서의 신화를 생산한다.
가수 인순이, 뮤지컬 배우 최정원,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국악인 안숙선 등 무대의 가수들은 한 명 한 명 각 음악 장르에서 성공한 카리스마 있는 여성 가수인 “디바”들이다. 특히 노래를 시작한 인순이는 보수적인 한국의 문화적 여건을 이겨낸 아이콘이기도 하다. 박근혜는 이들 “디바”의 상징을 차용하며 남자와는 다르게 감성에 호소하는 독보적인 여성 대통령의 이미지를 가진다.
이들은 또한 소녀시대나 아이유와 같이 현재 최대 인기를 얻고 있지만 남성들에게 소비되는 “어린” 여성 가수와는 다르게 중년에도 자신의 길을 가는 성숙하고 노련하며 자기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온 전문가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7만여 명의 관중에 있었을지는 모르나 비정규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저임금 여성노동자들, 집과 거리에서 남성들의 폭력에 고통당하는 여성들은 어디에도 없다. 아리랑 판타지는 또한 팝, 재즈, 창 다양한 음악 장르를 혼합하며 다양성의 화음을 만들며 문화적 다양성의 정치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결혼이주여성, 여성 이주 노동자들도 이 화음에 함께 어우러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성모마리아, 잔다르크 혹은 메르켈...“희망과 행복”을 주는 구원자
무엇보다 이날 취임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다수의 유명인과 국민합창단 300명이 함께 부른 “그댄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합창이었을 것이다. 가스펠과 같이 현대화한 종교 음악적이면서도 “힐링”적인 이 곡은 박근혜를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고 지목하며 성모마리아를 향한 찬송가와 같이 방송된다. 이를 통해“행복을 주어야 할 사람”이라는 요구와도 다르게 박근혜는 이미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 시작한 대통령이 된 것과 같은 구원자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오늘 31억짜리 취임식이 만든 박근혜의 이미지는 성모마리아적인 아우라를 가지면서도 잔다르크와 같은 그러나 독일의 메르켈과 같이 현재하는 이 시대의 자칭 “구원자”로서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가 쓴 이 이미지가 역사 이래 권력자들이 돌아가며 써온 낡은 가면일지 아니면 “쌩얼”일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철탑위의 노동자, 쪽방의 살림살이, 제주 강정 구럼비의 이야기가 그의 실재를 말해줄 것이며 이들은 또한 계속되는 쇼로 탈출하도록 강요받는 우리의 실재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