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자’는 실날 같은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시간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글로는 다 담아내기 어려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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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호 크레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사태와 관련된 행사가 있을 때, 꼭 빠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를 가슴에 품어 안고, 손을 잡고 나서는 엄마들. 그들은 바로 한진중공업 가족대책위 엄마들이다. 지난한 시간 동안 아빠들이 85호 크레인 앞을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의 뒤에는 바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빠들에게 조력자로, 동료로 크레인을 함께 지키고, 6월27일 행정대집행정지로 조선소에서 쫓겨나는 고통을 함께한 동반자다.
그래서 이제는 생계를 혼자 감내해야 하는 엄마들, 그들의 이야기는 다름아닌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들의 진짜 삶의 이야기이며, 정리해고로 인한 고통의 이야기다.
‘딸아이 학교 앞에서 슬러시를 파는 엄마의 마음은’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 가을 오후, 김해시에 위치한 우암초등학교 앞에서 한진중공업 가족대책위(이하 가대위) 홍미애(38) 씨를 만났다. 미애 씨는 은서(10), 은빈(7) 두 딸아이의 엄마다. 이 학교에는 큰아이 은서와 한진 가대위 아이들이 다니고 있다. 미애 씨는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슬러시를 파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처음 간 문방구는 제법 컸다. 문방구와 꼬치 전문점이 붙어 있어, 아이들이 정신없이 북적거렸다. 미애 씨는 수시로 오가는 아이들 덕에 4시간 동안 앉아 있을 새도 없이 바삐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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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애 씨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슬러시 기계를 두고 “저 슬러시 판매코너 담당이에요”라며, 웃어 보였다. 이런 미애 씨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다 문득, 왜 미애 씨는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 슬러시를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까?’라는 게 궁금해졌다.
"작년에 파업하고, 애기 아빠 퇴직금(3년6개월치)이 2월에 정리 되서 (애기 아빠)직업이 없어졌어요. 퇴직금이 남들처럼 10년 20년 되는 것도 아니고, 몇 년 되는 거로 빚 갚는 거지 그걸로 살아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때부터 일을 해야겠다 했는데, 애들이 너무 어려서 애들을 두고 갈수 없었어요. 애들을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나 찾다가, 마침 이 알바를 알게 된 거죠"
미애 씨처럼 가대위에서 활동하는 엄마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틀 한다. 미애 씨에게 생계문제도 중요했지만,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문제도 너무도 중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슬러시 파는 일을 선택했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처음에 나왔을 때 첫째아이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거참, 가야하나 말아야나’ 하고 생각했었죠. 나는 괜찮은데, 그 엄마가 혹여나 불편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죠. ‘나 가도 되요?’하고 물어보니까, 선뜻 ‘네 오세요.’ 하시더라고요. 너무 고마웠죠. 참 좋은 분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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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부터는 학교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이 우르르 나온다. 가장 먼저 끝나는 1학년부터 시작해서, 오후 3시까지 6학년 아이들이 쉴 새 없이 ‘아줌마’, ‘엄마’, ‘이모’를 불러 대고 있었다. 미애 씨의 큰아이인 은서는 연시 ‘엄마’를 부르며, 학교에서 뛰어 나왔다. 은서는 엄마를 학교 앞에서 만나는 게 좋단다. 가대위 아이들이 ‘이모’하며 친근한 인사를 한다. 아이들은 눈도장을 찍고 집이나 학원으로 향한다. 학교 앞에 있는 ‘이모’는 아이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늘어 난 것, 그것이 미애 씨가 이일을 선택하게 된 계기지만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어렵다. 미애 씨는 시급 4천500원, 하루 3시간을 꼬박 서있으면서 1만4천5백원을 받는다.
“이거라도 많은 보탬이 되죠. 예전에는 아이들 간식을 사줄 수 없었는데, 지금은 반찬값이랑 고지서, 애들 간식 정도를 사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그동안 실업급여로 버텨 왔는데 10월이 마지막이라 앞으로는 더 힘들어지겠죠. 가대위도 해야 하고 직장도 가야하고, 그러자니 가대위 활동이 힘들어 지고 그래서 걱정이죠. 요즘에 가대위는 저녁 집회 가는 거 빼고는 대부분 조를 짜서 움직이고 있어요”
미애 씨는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을까?
“이일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잖아요. 이보다 더 힘든 일들이 많은데요. 이정도로 힘들다고 하면 욕먹어요. 일 자체가 힘든 건 없어요. 가대위 활동을 하면서, 집안 일해야 하고 아르바이트까지 하려니 몸이 세 개라도 모자라요. 지난 번 신동순 조합원이 40일차 단식하실 때, 영도에 가서 동조 단식 하려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요”
미애 씨는 아침에 아이들 학교 보내고, 오전에 바로 영도로 향한다. 다시 김해로 알바 왔다가 끝나고 아이들 밥만 챙겨주면 또 다시 영도로 간다.
“설겆이도 못하고, 빨래도 개어 놓지 못하고 정말 힘들었어요. 영도에 갔다오면 피곤해서 애들 씻어 주지도 못하고 바로 자고,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려니 그게 제일 힘들었죠.”
미애 씨의 이런 생활에 대한 외부의 색안경 낀 시선들은 없을까? 미애씨는 이런 문제에 대해 오히려 씩씩하다. “주위의 시선이 있어도 잘 못 느껴요. 제가 좀 둔해요”하며 웃는다.
“사실, 남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빨리빨리 잊어버려요. 남들이 색안경을 끼고 본다고 해도, 내가 떳떳한 일이기에 신경 안 써요. 그래서 남들이 왜 이런 일을 하냐고 했을 때, 당당히 대답을 해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불만이 있다면, 나에게 직접 와서 이야기 하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신경을 잘 안 써요”
‘축하 노래에 맞춰 박수 치지 않는 아이들’
미애 씨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깊은 시름에 잠겼다.
“얼마 전에 돌잔치에 갔는데, 노래를 하는데 보통 손뼉을 치잖아요. 그런데 애들이 (투쟁가를 부르듯)손을 흔드는 거예요. 그걸 보고 가슴이 철렁했어요. 너무나 가슴 아팠죠. 그런 모습을 평소에 안보여 줘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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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진가대위 아이들 |
그녀는 정리해고사태가 길어지면서, 아이들의 변화가 눈에 띄게 심해졌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변화가 유독 가슴을 아프게 해요.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정리해고’, ‘연대’등의 단어를 쉽게 쓰는 걸 보면, ‘정말 아이들한테 더 보여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게 되죠. 아이들한테 경찰과 경비는 ‘우리를 막는 사람’. 그래서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버렸어요”
이소선 어머니 영전이 85호 크레인에 왔을 때, 정문으로 이동하려 하니 큰 딸 은서가 ‘못 들어 갈텐데, 왜 가?’하며 물었다며 미애 씨는 아이들이 지금의 상황을 느끼고 아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우리 아이들은 공장에서 놀던 아이였어요. 조선소에서 쫓겨 나기 전에 생활관에 있었거든요. 당시에는 안에 목욕탕이 있어서 아이들이 안에서 수영장처럼 물놀이 하고 놀기도 했죠. 또, 지금 85호 크레인 중층에 계신 박성호 아저씨가 풍물도 가르쳐 주시고. 애들한테 아빠 회사는 놀이터였어요. 헌데, 이제는 쫓겨나고, 용역들이 정문을 지키면서 더 이상 들어 갈수 없게 되었죠”
미애 씨는 지난 일을 회상하며, 아이들이 전경의 방패에 찍힐 뻔한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고 했다. 아무리 아이들한테는 숨기려 해도, 보여 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그녀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한다.
가대위는 지난 8월 국회환노위 청문회에 방청과 기자회견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었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갔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금속노조 사무실에서 국회로 출발한 가대위 차량에 경찰이 따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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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금속노조에서 잠을 자고 나오는데, 그때부터 차가 따라 붙는 거예요. 운전하는 아저씨가 ‘어 경찰차 붙었네’ 하시길래, ‘에이 설마요. 자기들도 가는 거겠죠’ 했는데, 청와대 근처에 가니까, 자꾸 1차선으로 못 가게 3차선으로 차로 미는 거예요. 제가 앞에 있었는데, ‘밀어, 밀어’ 하는 게 다 들리더라고요. 그렇게 밀려서 결국 국회 앞 국민은행에 도착했죠. 그런데 경찰차가 혹시나 청와대로 갈 것 같으니까. 순간적으로 영화처럼 차 앞에 급정거해서 막았어요. 정말 사고 나는 줄 알았어요. 내리니까 가대위 왔다며, 확 둘러싸고, 화장실 갈 때도 따라붙고, 또 애들 먹일 거 산다고 편의점을 가도 따라 붙고. 국민은행 앞으로 올 때 까지 따라 붙었어요. 기자회견도 못 가게 하고, 아빠들한테도 못 가게 하고. 그걸 아이들이 다 보았죠. 그래서 너무 화가 났어요. 생전 경찰이랑 그렇게 밀고 당기기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날은 처음으로 그렇게 했죠. 그날 아이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제가 나오라고 말하니까 안 나오는 거에요. 무섭다면서…”
가대위는 결국 청문회를 못보고, 언론으로 청문회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들려온 소식은 ‘조남호 회장이 컨닝 페이퍼로 시간끌기와 모르쇠로 일관 했다’는 소식이었다.
‘6월27일의 악몽이 재연될까 두려워요’
인터뷰 하는 동안 씩씩하던 미애 씨가 6월27일을 회상하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혔다.
6월27일, 채길용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은 회사 측과 파업을 함께 했던 조합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사측과 합의서를 작성했다. 이 합의서로 지회는 파업을 철회하게 되고, 법원의 행정대집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 결국 파업 중이던 한진중 조합원들은 조선소 밖으로 쫓겨 나 85호 크레인 맞은편 신도 브레뉴 아파트 앞에서 노숙농성에 돌입하게 된다.
미애 씨는 당시가 가장 힘들었다며, 앞으로 새롭게 뽑히는 집행부가 혹여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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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희망버스 당시, 영도조선소에 피켓을 들고 있는 한진가대위 |
“뜬금없이 6월27일이 많이 생각나고, 270일이 넘어가는 크레인에 대한 걱정이 커요. 그리고 우리가 잊혀 가는 건 아닐까.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더라도, 94명보다 1,400명이 더 중요하다며 합의해 버리고 우리는 ‘나 몰라라’ 하지 않을까. 새 집행부가 들어 서 ‘돈 얼마에 합의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내가 한 게 물거품이 되는 건데, 이런 걸 생각하면 끔찍해요. 겁도 나고...”
눈가에 고여 가는 미애 씨의 눈물은 결국, 채길용 지회장에 배신감에 대한 분노로 변해 갔다.
“자꾸 6.27만 생각 하면 정말 가슴 아프거든요.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10시에 파업을 접겠다는 기자회견을 한다길래, 그건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10시에 맞춰서 가고 있었어요. ‘설마 행정대집행을 할까?’라고 생각했었어요. ‘설마 여론이 있는데, 하겠나’ 하고 생각하고 채길용 지회장을 막아야 한다 생각하고 갔었어요. 기자회견만 막고 집에 온다고 생각하고 갔었거든요. 그랬는데, 정말 행정대집행이 되는 거예요. 채길용은 기자 회견문을 팩스로 다 날려서 공식화처럼 다 되버린 거고. 그때가 제일 힘들었죠. 아저씨들 쫓겨 나시고, 갈 때 없어서 신도브레뉴 앞에서 욕 다 먹어 가면서, 길거리에서 밥 먹어 가면서 노숙하면서. 그때가 진짜 힘들었어요.”
한진중 조합원들이 신도 브레뉴 아파트 앞에서 노숙을 시작하자 아파트 주민회에서 처음에는 조합원들을 쫓아내려고도 했었다고 했다. “비도 많이 오던 날이었는데, 가서 무릎 꿇고 빌었어요. 우리 아저씨들 여기 아니면 갈 때 없다고, 조금만 참아달라고.” 그날의 힘들었던 기억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애 씨는 채 지회장을 8월 청문회에서 처음으로 보았다고 한다. “청문회가 끝나고 보고대회 하는 거 보려고 갔더니, 오는 거예요. 아저씨들이 속은 터져도 말을 못하잖아요, 자기네들이 말하면 싸움 날 것 같아서, ‘엄마들 가서 채길용 저마 오는데 머리 안 끄집어 잡나’ 하는 거예요. 우리 엄마들 너무 착해서 그러진 못하고, 한마디 했어요. “혼자 사니까 좋냐고”, 저는 뭘 잘했다고 걸어 오냐고 했더니, 그냥 쓱 가더라구요.”
감동과 근심의 연속 ‘희망의 버스’, 5차 희망버스로 끝나길
한진중 가족들이 가장 힘들 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희망버스였다. 미애 씨는 희망버스를 ‘기쁘면서, 슬펐던’ 순간으로 기억 하고 있었다.
“기쁘면서, 슬펐던 게 희망버스 였던 것 같아요. 파업하면서 진짜 힘들었을 때 희망버스가 왔어요. 그때 정말 한진중공업 기사거리가 하나도 안 올라 올 때였어요. ‘우리가 더 이상 할 일이 뭐가 있을까’라고 느꼈으니까요. 이러다가 진숙 언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말라 죽지 않을까 할 때 였어요”
1차 희망버스를 앞두고, 한진중 정리해고사태는 이미 장기화에 접어들었다. 회사 측이 직장폐쇄를 했고, 조합원들은 파업을 하고 있었지만, 직장폐쇄 기간의 파업은 회사에 타격을 주지 못했다. 결국 조선소에는 용역경비들이 투입되었고, 조합원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미애 씨는 1차 희망의 버스가 도착한 날을 ‘피 말리는 시간과 감동’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희망버스를 기다리는 ‘피 말리는 시간’은 바로 회사측이 고용한 용역경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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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희망버스, 85호 크레인 앞 |
“맨처음, 그때(1차희망버스)는 정말 감동이었어요. 아저씨들이 그 전날에 용역들어 와서, 오전 7시 부터 정문을 막았었어요. 그때부터 정문 앞에서 기다렸거든요. 정말 그 하루가 피를 말리는 순간이었어요. 엄마 8명이 조선소 정문에 가서 ‘아빠들 만나야겠다. 비켜라’ 하면서 있었죠. 사람들을 기다리는 데요. 오전 그 시간이 너무나 조마조마 한 거예요”
당시 조선소 안에 있던 조합원 들은 생활관에 갇혀 있었다. 행동이 제약되어 바깥 상황을 전화로 소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나 용역 애들이 맘먹고 아빠들 치지나 않을까. 그러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누가 알겠어요. 아빠들이 많이 다치고 밥도 해먹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러다보니 오전에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거예요. 오후 2시가 지나니 사람들이 200여명 모여 있었지만, 불안한 거예요. 200명의 사람들이 안에 사람들 구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적으니까. 경찰이 와도 안에 들여보내지 않는 상황 이었거든요. 경찰도 못 들어 가는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맞아 죽지는 않을까 하고 불안하니까. 피가 바짝바짝 마르더라고요. 희망버스가 10시에 온다고 했는데, 오질 않으니까 공ㅈㅇ 안에서는 희망버스 왔냐고계속 전화가 오고… 그러다 1시쯤 사람들이 왔잖아요.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이제 왔구나. 진짜 그때는 너무 감동적이고, 너무 고마운 거예요. 그 사람들 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안도가 되고, 특히 사다리 타고 넘어 갔잖아요. 아빠들이 풀려나고. 그 사람들이 너무 고마울 수밖에 없고. 용역들 밖으로 나오고. 전화 해보니 안에는 축제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1차 희망의 버스 당일날 가족대책위는 조선소 안으로 끝내 들어오지 못했다. 가대위와 가족들은 조선소 밖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부산지역 사람들과 함께 거리에서 밤을 지샜다.
미애 씨는 희망버스에 대해 김진숙 지도위원이 그 광경을 함께 하지 못함에 아쉽고, 안타 깝다고 한다. 그리고, 영도를 가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을 참가자들의 아쉬움이 컸을 거라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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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역에 모인 2차희망버스 참가자들 [출처: 2차 희망버스 합동취재팀] |
“2차 때는, 비가 그렇게 억수처럼 왔죠. 그래서 설마 1차 때보다 많이 오겠나 했는데, 부산역 광장이 가득 찼어요. 그런데 이런 광경을 안에 있는 조합원들이나 진숙언니가 이를 못 본다는게,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아쉬움이 컸었죠. 희망버스가, 뚫고 들어 갈 거라는 생각을 안해 봤어요. 막히면 난장을 치겠지 생각해가지고, 2차 때 처음으로 최류액을 봤어요. 어리둥절 했고, 경찰이 일방적으로 막았다는 것에 분노했었죠. 그리고 크레인 앞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컸고, 안에서는 밖에 걱정이었죠. 항상 1,2 차 때는 걱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한진중 가족들은 희망버스를 보내고, 아쉬움에 1주일간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제 5차 희망버스가 부산 영도로 온다. 미애 씨는 마지막 소풍 여행이길 바란다. 그리고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다.
“5차요? 정말 끝났으면 좋겠어요. 이번이 ‘가을소풍’이잖아요. 이제 겨울까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번 5차 희망의 버스가 그런 계기가 되어야 해요. 제 생각인데 싹다 밀고 올라가서 데리고 내려 왔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견디라고 하는 건 사람으로서 못할 짓 같고, 더 이상 만들어져서는 안 될 것 같고, 할 수만 있다만 공장으로 다 들어가서 모시고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꿈 꿔요”
조남호 회장은 회장직 그만 두고, 모두 일상생활로
미애씨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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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호 회장의 대국민 호소문 발표 기자회견 |
“조남호 회장에게 ‘회장직 그만두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한진중공업은 조남호 일가가 있는 이상은 정리해고 싸움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아요. 예전에 어떤 아저씨가 자신이 입사 했을 때, ‘조남호 아버지한테 짤렸고, 그의 아들 조남호 한테 또 짤렸다’ 하시더라구요. 이렇게 되물림되는 이상은 한진중공업에 계속 피를 부를 것 같고, 노동착취만 할 것 같아요. 조남호 일가를 한진중공업에서 없앴으면 좋겠어요. 그래야지 우리와 같은 일이 안 일어 날 거에요. 그래서 정리해고가 빨리 철회 되서 아빠들 집으로 갔으면 좋겠고, 진숙언니도 병원으로 가셨으면 해요.“
하루 빨리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미애 씨의 바람이, 그녀의 소박한 희망이 5차 희망버스와 국정조사로 이루어 질 수 있을까? 미애 씨와 가족의 삶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모든 이의 삶의 표본이기에, 우리는 끝까지 주시해야겠다. (기사제휴=미디어충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