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를 반대한다. 이 기사는 논쟁중
인터넷실명제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실명제를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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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하지 않고 삶을 마주한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

비정규사회 1998-2015 대담 it 수다

[편집자주] 12월 2일 “비정규 사회” 출판기념회를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와 비정규직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 주최로 열었다. 출판기념회라는 형식을 빌었으나 노동시장 구조개악의 태풍이 몰아치는 한 가운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오늘의 투쟁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마련된 자리였고, 그 마음을 함께 해 주는 분들이 참가해 주었다. 2부에서 나누어진 이야기를 여기에 싣는다.

출판기념회(2부)는 비정규직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 김소연의 사회로 비정규직 투쟁의 당사자들, 그리고 현재 투쟁을 이어가는 노동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진행되었다. 간접고용 노동자로 투쟁을 시작해서 업체는 형식에 지나지 않고 사실상 SK의 정규직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던 인사이트코리아 투쟁 당사자인 김인선, 공공기관임에도 비정규직을 무한히 사용하기 위해 외주화를 시도하자 이에 맞서 투쟁했던 KBS 계약직 김지해, 회사의 경영위기를 조작해 정리해고, 노조탄압을 자행하고 결국 공장 문을 닫아 버린 자본에 맞서 질긴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콜트콜텍 김경봉, 노조탄압에 맞서 현장에서 끈질기게 버티며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있는 세종호텔 김상진, 이 노동자들의 투쟁하는 자리 옆에서 뒤에서 늘 함께 투쟁의 한 주체로 연대활동을 펼쳐 온 문화연대 신유아 씨가 모였다. 현장에 참석한 보건복지정보개발원 봉혜영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출처: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 김인선의 이야기

“당연한 거야”라는 말에 움직여 시작된 노조가입과 투쟁

스무살에 학교 졸업하고 98년 5월 입사했다. 당시는 취업 나갔던 사람들도 다시 와서 취업을 기다릴 정도로 취업이 어려웠다. 간단한 일을 하면 된다고 해서 일을 시작했고, 그때가 유공에서 에스케이 넘어갈 때였는데, 에스케이인 줄 알고 가서 일했다. 의료보험에 인사이트 코리아라고 찍혀서 이건 뭐냐고 물었더니, ‘너희 회사’라고 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취업만 해도 잔치를 할 정도의 시절이었고, 또 팀 내에는 여성이 나 한명이었고 일도 간편해서 다른 불만이 없었다. 다만 월급날, 보너스날에는 달랐다. 선물 받을 때나 보너스 받을 때 그게 없으니까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노조를 만들 때는 … 퇴근하면서 제일 친한 분이 ‘나 믿지?’ 하면서 지하철 입구에서 파일을 펼쳐 놓고 싸인해 달라고 해서, 뭐냐고 물어보니 노조라고, ‘나쁜 건 아니야, 당연한 거야’라고 했다. 그 말이 주는 느낌 때문에 가입을 했다. 그런데도 해고될 때 까지 노조가 뭔지 잘 몰랐다. 그때 가입한 사람들을 룸싸롱이나 이런데 가둬놓고 회유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터치도 없었다. 후에 들으니 나를 가입시키긴 했지만 비서업무를 했기 때문에 노조에서도 나를 완전히 믿지는 못했다고 했다. 해고 전날까지도. 그래서 아직도 말한다. 노조 만드는 분들한테는 절차를 지켜서 교육도 시키고, 나중에 회사도 잘리고, 카드도 막혀서 추심인들이 집에도 찾아오고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미리 이야기해 주라고.

두 번의 해고, 연대의 힘과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버텨낸 시간

하루 아침에 경비대에서 출근을 막을 줄은 몰랐다. 당시에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나, 방송사 파견노동자 투쟁하던 주봉희, 이런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해도 ‘저들은 누군가, 왜 머리에 페인트를 칠하나, 왜 나는 출근 못하고 피켓팅을 하고 있지? 이러면 출근할 수 있나?’ 이러면서 살았다. 그렇게 싸우다가 파견법이 어쩌고 하면서 나 하나만 복직을 했다.(당시에는 불법파견에 파견법을 적용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 부정적인 법해석이 있었고, 파견법상 파견허용업무에 해당한 김인선만 복직이 되었었다) 이후 행정법원에서 져서 두 번째 해고되었을 때는 진짜 욕이 나오고 싸우자 라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집안의 가장이었는데, 카드 이자가 20프로 40프로 이러고, 카드회사에서 집에 찾아오고 할 때였다. 두 번째 해고를 당했을 때는 카드사에 또 시달려야 한다 생각하니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

첫 해고 이후에는 매일 대책회의를 했다. 잠시 복직을 했을 때도 함께 했고, 하루는 철폐연대, 하루는 민주노총 이렇게 다니면서 회의를 했다. 그때 22살이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회의 하면서 졸기도 했다. 그때는 민주노총도 잘 몰랐고 그냥 도와주는 사람들, 선생님, 오빠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 번째 해고되고 나서는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행정법원 판사는 왜 나를 해고했을까, 왜 나랑 함께 한 노동자들은 왜 보호를 못 받고 회사에 못 들어올까, 이런 생각이 수없이 들었다.

같이 한 노동자들을 늘 믿었다. 선배님이 말한 것처럼 당연한 권리라고 하니 버틸 수 있었고, 조그만 토도 안 달고 맞는 거야, 그렇게 해야지 하는 편들이 많았다. 그때는 민주노총이 좀 상황도 좋았고, 티비에도 생동감 있게 나왔었다. 그들이 함께 해주니까. 연세대 마당에서 주점도 하고, 소개도 되고. 회사는 나를 잘랐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나중에는 지친 노동자들보다 막내인 내가 더 격려하면서 투쟁을 이어가기도 했다.

달라지지 않은 삶, 그러나 달라진 시선

사실 지금은 비정규직을 위해서 싸우지는 못한다. 끊임없이 놓을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집회현장에서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 쟁취라고 하는데 그 말이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온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가서 복직한 지 15년이 넘었는데 달라 진 것이 하나도 없다. 누구 말로는 노동부 역사가 바뀌었다 어쩐다 한다. 그런데 내 삶이 달라지지 않았다. 남성 사업장이다 보니 여성은 급여가 정규직인데도 3분의 1인데, 법적으로 제기하면 할 수 있겠지만 회사에서는 다 피해가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정규직이 더 불안하다. 비정규직이 다 뭉치면 정규직 아무 소리 못한다. 비정규직으로 일해 봤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정규직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관리자 마음대로 고과 매기고, 조합원 2500명 중에 여성 조합원 나 혼자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된 것보다 그것이 더 눈엣 가시일 것 같다. 그리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싫겠는가. 지금 나는 회사에서 일을 주지 않아서 일이 없다. 노조에서 회사와 면담도 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쉬운 해고 뭐 이러면 치가 떨린다. 비정규직일 때랑 다른 것이 없다. 비정규직 투쟁에 가서 정규직화 쟁취 이러면 나는 마음에 안 든다. 원래 마음에 안 들었다. 누구를 모델로 그걸 한다는 게 웃기지 않나.

노조 활동은 제대로 못했지만, 어찌됐건 해고를 두 번이나 겪었고, 98년 고등학생이 아닌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사회생활은 정말 혹독했고, 남성 사이에서 여성 조합원의 문제, 임금 차별, 업무도 직군을 구분하고 …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미친 짓인 것 같다. 시야가 달라지니까 사는 게 의미가 없어지기도 했고, 엊그저께는 KTX 승무원들을 보면서 거기에 내가 서있는 것처럼 같이 울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나라에서 … 그래도 연대하는 이들이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그러니까 꾸준히 운동하면서 더 해야지 하면서 이제까지 온 것 같다.

# 김지해의 이야기

2009년 8월 어느날…

2002년 8월 KBS에 입사해 지난 7월 31일까지 정확하게 만 7년을 일했습니다. 365일 쉬지 않는 KBS 보도본부 인터넷뉴스팀에서 지난 7년간 KBS의 새벽을 깨우고 KBS의 밤을 지키고 KBS의 공휴일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원하던 방송국에서 일하게 되서 너무 기쁘고 감사했지만,.. 박봉과 불평등한 현실이 때론 너무 서럽고 억울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자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면 살인이라도 하고 싶다던 후배를 안고 한참을 울었던 일도 있습니다.

2007년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되자 금융권은 정규직이나 무기계약 전환을 했고, 모 기업과 병원들은 해고를 하는 등 극과 극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KBS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저는 2년만 참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2년이 되던 날 해고장이 내 손에 쥐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이 일을 겪으면서 정규직 해달라는 것은 내 욕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팀에만 14명, KBS에 420명, 전국에 850만명, 그리고 그 850만명의 가족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비정규직보호법에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 받고 있습니다.

KBS는 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다. 함께 일하고 싶답니다. 그런데 비정규직보호법 때문에, 회사경영문제 때문에 해고하며 불안한 자회사로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그 자리에 그대로 일하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KBS의 필요한 인력입니다. KBS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2년이 될 때까지 그 끝까지 사용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법을 지킨다는 명목아래 자회사로 보내거나 버리고 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참 창피했습니다. 제가 비정규직인 사실이 아닙니다. 이렇게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버리는 KBS가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대한민국의 대표방송국이며 대한민국의 대표기업이라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 대표기업 KBS를 상대로 해고무효소송을 시작하는 우리는 대한민국 대표입니다.)
우리가 KBS를 바꾸겠습니다!
일자리가 희망이라는 것을 KBS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겠습니다!

2011년 복직 이후… 2015년 12월 현재…

이 시간을 준비하면서 다시 생각을 더듬어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자회사로 가지 않고 소송하다 회사와 합의로 복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일부 소수는 계속 소송하다 대법 승소 이후 회사에 복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회사는 아직 우리를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무기계약직으로 지칭하며 정규직과 차별합니다.

비정규직법 이후 함께 일하는 직원, 후배들 중에는 파견직이 많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해외에 가서 일하라고, 거기선 최저 임금이 우리나라보다 2~3배는 된다고, 그래서 준비 잘해서 거기서 취업하든지, 영어라도 잘해서 돌아오라고…

또 그들 중에는 우리의 지시아래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엔 우리보다 월급이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우린 아직 10여년 전에 받았던 첫 연봉에 단 몇 % 올랐을 뿐인데… 이런 불공평과 부당함 속에 불평 아닌 불평을 하면 일부 선배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럼, 회사가 그들이 받는 월급을 너에게 준다면 넌 파견직으로 2년 일할래? 지금 받는 그 연봉으로 계속 일하래?” 이게 말이 되는 이야깁니까? (그들이 우리보다 못해서 우리가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직도 박근혜 정부는 이상한 법과 포장된 말 임금피크제, 청년 일자리 등을 제시하며 임금을 줄이려 하며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바꾸려 합니다. 40대 후반의 기자 선배가 이야기 하더라구요. “난 그래도 끝까지 있겠지만, 너희는 정년이 보장될까? 보호될 수 있을까?”
우리의 투쟁이 멈출 수 없는 시간입니다.
“난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을 더 당해봐야 비정규직의 슬픔, 집 없는 설움을… 말만하는 그런 거 말고 정말 현실적으로 그들의 아픔에서 내 아픔으로 함께 느끼며 또, 함께 공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이야기 하던 제게 한 후배가 얘기하더군요.
“누나, 누난 이제 그만 당해도 돼요. 충분히 아팠고, 충분히 당했고, 이제 더 이상 당하면 안돼요”
참, 눈물 나게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는 아프고 또 아픕니다.
그래도 저는 이 아픔이 끝나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하고 또 기다립니다.
함께하는 노동자들이 있어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 김상진의 이야기

8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에 장충동에 있는 호텔에서 1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을 했었다. 최저임금이 800원 정도였는데, 호텔에서는 시간당 1000원을 줬다. 나중에 정규직 전환해 달라 했더니 군대 안 갔다 와서 안 된다고 해서 그만뒀다. 세종호텔에 입사해서는 3개월 수습, 정규직으로 일해 왔다.

세종호텔은 세종대학교 재단 산하 수익사업장이다. 100프로 지분을 학교가 가지고 있고, 수익은 교육, 발전 사업에 쓰이도록 되어 있다. 세종대는 사학비리로 유명한 대학교이다. 세종대가 비리, 탐욕이 심하다 보니까 내가 2006년 위원장이 될 때 당시 계약직이 많았다. 장기계약직은 10년 가까이 된 사람도 있었다. 노조 선거 공약으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내걸었고, 그 전에 경영권 분쟁이 있어서 비리 이사장이 회사에서 쫓겨나고 임시 이사장이 있었는데, 2007년 비정규법안이 통과될 때 회사와 교섭을 통해 1년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단협을 맺었었다. 호텔업계가 주차, 룸메이드 등 외주화가 많이 되어 있는데, 세종호텔은 비정규직 비율이 높지 않았다. 이사장이 새로 오면서 얼마 전부터 외주화가 확대가 되었다. 그 전에는 정규직을 강제 사직시키고 촉탁직을 늘려왔다.

2012년 1월에 로비 점거 파업을 했었는데, 2011년에 회사가 복수노조를 만들어서 우리가 소수노조가 되어 있었다. 파업을 하면서 쟁점이 되었던 것 중 하나가 단체협약의 정규직 전환 조항이었다. 회사는 이를 무력화시키려 했고, 노조는 1년이 넘은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면서 투쟁을 했다. 많은 요구들 중에서 그나마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는 관철되었다. 정규직이 된 분이 네 분이었고, 두 분은 정년이 되어 퇴사했다. 나머지 두 분은 회사의 탄압에도 끝까지 함께 싸우고 있다.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결과물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 김경봉의 이야기

지금은 정치하는 사람들, 자본가들의 논리에 의해 국가가 돌아가고 있다. 법도 자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정당하게 싸울지라도 법에서는 자본의 손을 들어준다. 처음 노조를 만들 때 불법을 저질러도 이기면 합법이 된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그게 어렵다.

85년도에 결혼을 하면서 애가 있으니까 직장에 들어가서 생활을 하고,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몰랐다. 처음 접한 것이 콜텍에서였다. 나는 7자를 개인적으로 싫어하는데, 처음 입사해서 7년 만에 문을 닫았고, 두 번째도 7년 만에 문 닫았고, 세 번째가 콜텍인데 만 7년 만에 이렇게 됐다.

그때는 노조를 몰랐고,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는 세대였는데, 지금은 공경 받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고, 박정희가 고속도로 만들고 경제 키우고 할 때는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노조를 해보니 매스컴에 나온 것이 다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회사와 싸우고 조금씩 얻어내고 하면서, 열심히 했는데, 해고 투쟁하면서 어려워지니까 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투쟁하면서 사실 잃은 것은 굉장히 많다. 대학 등록금도 한번 못 내줬고, 마음이 아프지만…. 노조를 통해 사회에 나와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인 것을 많이 보았다. 어렵게 아이들과 생활했지만 문화라는 것을 전혀 몰랐고, 졸려서 티비도 못 보는 생활을 했는데, 노조하면서 밴드도 하고 연극도 하고 우리 문제도 알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처음 2-3년간은 노조를 통해서 과격하게 싸웠다. 대전에서 8차선 도로 점거, 본사 점거, 고공농성, 단식도 했는데, 3년 지나니까 노조에서 많이 힘들어지는 시기가 왔다. 문화연대를 만났고, 기타노동자다 보니 연주자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고 결합하기도 했다.

기륭이나 재능을 보면서는 내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지금도 저렇게 못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걸 능가하기 위해서 새누리당 앞에서 단식농성 하고 있는데, 경찰이 또 건드리지를 않는다. 싸울 기회를 안주어서 힘들게 싸우고 있다.

# 신유아의 이야기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현장에 있는 분들이 문화예술적 기질을 다 가지고 있다. 이를 표출하지 못하는 환경, 나는 노조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투쟁가를 불러야 하고 조끼를 입어야 한다는 등… 그림을 훨씬 잘 그리고, 만들기를 잘하고, 노래를 잘하는 조합원들이 진짜 많다. 그런데도 본인들이 직접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런 것이 있다. 현장에 나가서 제안할 때는 작가들이 만들어서 드러내놓는 것보다 참여하는 방식들을 찾아보자는 고민을 항상 했다. 그런 고민이 많이 해소되었던 때가 용산 투쟁 때, 현장에 왔던 여러 문화활동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각자 현장에 다니면서 개별적으로 연대 활동을 해 왔는데, 그 이후에는 돕는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연대하는 것이 많아졌다.

# 봉혜영의 이야기

최근에 겨우 교섭이 되고 있었는데, 원장이 사임하고 총선에 나온다고 하여 그나마 합의된 것이 의미 없게 되어 버리려 하고 있다. 결국 총선에 나가려고 잡음 없이 하려고 마음에 없는 대화를 한 것이었을 뿐인 것이다. 또 공공기관이라고 서로 책임을 넘기기도 하고, 교섭자리에 앉히기 까지가 굉장히 힘들다.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 달래기 위해 자리를 내려줄텐데, 그러면 그때까지 또 공석이 될 것이다.

올 겨울을 어떻게 나야하는지 또 걱정이 많다. 올해 12월 28일이면 해고 만 3년이다. 열심히 투쟁해야 겠다는 생각을 이야기를 들으면서 했다. 나중에 우리 이렇게 투쟁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도 열심히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 정리의 말 : 삶에 대해 질문하며 강함을 깨우쳐 가는 시간

“토론회에서 격한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을 놓고. 그때 그는 화장실 까지 따라와서, 그렇게 까지 격한 투쟁을 했던 당사자들이 지금 어떻게 사는지 당신이 알고 있냐고 그렇게 싸워봐야 남는 게 없다는 이야기를 내게 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매년 한 번씩은 꼭 만나고 있고, 투쟁에서 철저하게 깨졌지만, 그리고 그 투쟁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자기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많이 고민하고 있다. 그런 노동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 있겠는가.

굉장히 힘든 싸움이었고, 처절하게 깨져서 저기에 무슨 희망이 있냐고 얘기했던 투쟁도, 그들은 삶의 큰 힘이라고 이야기 한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평생을 살면서 길든 짧든 내가 마음껏 나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질문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시간인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인간답게 살아본 경험이 있다는 것은 삶의 얼마나 큰 힘인가. 아주 긴 날들을 우리가 들여다보면 그래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이런 경험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그것이 희망을 서로에게 주고 사건이 벌어질 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함께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연대하는 이로서) 투쟁하는 이들 옆에 잘 있었던 것 말곤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힘을 받기도 하고,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이라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조건에 내팽개쳐지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순간에도 자존감, 인간성,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지키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존재이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투쟁하는 기간 동안 여러 번 다투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지만 그 순간을 견디고 극복하면서 나아간다. 이겨서 희망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바뀌고, 사회가 어떻게 폭을 넓혀 갈수 있는지를 보게 되는 것이 희망이다. 아픈 길을 걷는 노동자들이 희망을 가지고 좀 더 잘 버텼으면 좋겠다.” - 김혜진

“(기륭전자에서) 노조 만들고 파업하고 해고될 때, ‘해고당하고 싸울래, 해고 되고 싸울래?’ 라고 해서 파업에 들어갔는데, 조합원들은 악 소리 할 수 있어서 좀 살 것 같다는 이야기들을 했었다. ‘잘하고 있어’라고 해주고 옆에 있어 주는 것, ‘함께 할게’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저자의 책이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일구어 가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 김소연

“출판사 일한지 10년이 좀 안되었다. 책을 좋아했고, 만드는 일은 더 즐거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급여가 잘 오르지 않고, 책 판매량이 줄고… 책은 사회가 좋아야 잘 팔리는 것이기도 한데, 내가 하는 일이 사회가 좋아지지 않고서는 좋아지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책 만드는 일이 내가 자부심을 갖는 노동이라면 그 책으로 사회가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책을 만들 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런 기준에서 <비정규 사회> 작업은 너무 즐거운 일이었다. 글을 가장 끈기 있게 써준 저자에게도 감사하고, 글이 나올 수 있게 현장에서 같이 싸워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 윤상훈(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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