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가 죽기 전에 살아온 길을 남기는 회고록쯤 될 것 같다. 죽음을 앞두고 회고록을 쓰는 이유는 내가 걸었던 길이 정리해고 비정규직 투쟁의 발자취였고, 내 죽음은 그 발자취가 얼마나 험난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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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난 태어나면서부터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내 전임자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예상대로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노동자 투쟁 현장에 나타나면 경찰은 나를 졸졸 따라 다녔고, 때론 나를 둘러싸고 내 눈을 때리고 내 팔을 젖히고 어디론가 끌어가곤 했다. 경찰은 내가 조금만 거슬리면 입을 막고 내 다리를 묶기 위해 위협했다.
2012년 6월 10일 광화문을 거쳐 청와대로 가는 ‘민중 올레’ 길이 그랬다. 내 뒤엔 200여 명의 노동자와 민족민주 열사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렬이 따랐다. 날씨는 화창했고 경찰들은 초여름을 알리는 청색 반팔티에 방패를 들고 나왔다. 민족민주열사 추모대회가 끝난 후 시작된 ‘민중올레’ 행진은 구 삼성본관, 광화문 KT 사옥,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를 거쳐 대한문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대기업의 탄압에 항의하는 행진에 함께한 200여 명은 프레스센터 앞에서 경찰이 막자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쉬지 않고 경찰과 지나는 시민들을 향해 우리 행진이유를 설명했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경찰은 나부터 연행을 시도했다. 당시 연행을 지시한 사람은 악명 높던 남대문 경찰서 최성영 경비과장이었다. 아직도 나와 내 동지들을 그대로 엮어서 연행하라던 그놈 목소리가 생생하다. 나는 당시 집회가 끝나고 풀려났지만 나와 함께 연행된 사람들은 용산경찰서에서 48시간 동안 구금됐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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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덤과 아픔 사이
경찰에 둘러싸이거나 끌려가는 위협 따윈 무덤덤하다. 하도 많이 협박을 받고 끌려가고, 두들겨 맞아서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런 위협쯤은 신경도 안 썼지만 피곤하긴 했다.
하지만 내가 함께하는 노동자들이 끌려가고 맞고 때로는 영하 10도가 넘는 찬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볼 땐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주로 그들의 앞과 옆에서 함께 걸으며 그들의 말을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어떤 땐 그들의 뒤를 말없이 따라가면서 다치거나 뒤처진 사람들, 힘들어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그들이 필요한 물건이나 식사도 보통 내가 운반한다. 이쯤 되니 사랑을 안 받을 수가 없다.
최근에 가장 마음이 아팠을 때는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 오체투지에 참가했을 때다. 워낙 지렁이처럼 기어가다 보니 지원하는 나도 천천히 가야한다. 도로를 건널 땐 그들이 위험해지지 않을까 아슬아슬하다. 특히 오체투지 뒤를 따라갈 땐 마음이 편치 않다. 난 키가 커서 대부분 사람들을 내려다보는데 안타깝고 애잔했다. 희망 뚜벅이 뒤를 따라갈 때는 그래도 즐거웠다. 수십 킬로미터를 걸었지만 그들은 지치지 않았고 즐거워했다. 나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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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인 협박을 받으며 경찰에 둘러싸인 전해투 방송차 |
24만 649km
내가 지나온 길은 약 24만 649km가 조금 넘었다. 많이 걸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 생애를 통틀어보면 다른 친구들에 비해 많이 달리진 않았다. 나는 보통 걷거나 그냥 멈춰서서 하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멈춰서 있거나 천천히 걷는다고 해서 편한 게 아니다. 그럴 때도 나는 내 안의 에너지가 고갈될 때까지 노동자 옆을 지키고 있고, 내 심장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고 나팔을 불고, 사람들을 차량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달린 길은 많지 않지만 생각보다 짧고 굵게 살았다.
나팔
나는 나팔을 잘 분다. 나를 아껴주던 사람들이 전해투에 데려오면서 준 선물이다. 나는 나팔을 받고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 나는 4개 1조의 나팔을 가지고 있고, 지금 두 개가 부러져 있다. 나팔은 항상 등에 지고 다니는데 지하주차장에 들어가다 부딪혀 부러졌다. 내 나팔엔 음향시스템이 연결돼 있고 마이크도 아홉 개나 꽂을 수 있다.
이건 자랑이지만 최근엔 USB 메모리와 시디를 넣으면 음악을 연결할 수 있는 시스템도 20만 원이나 주고 장만했다. 고공 농성하는 사람들과 전화 연결을 할 수 있는 55잭(1/4 PHONE plug) 단자에서 이어폰으로 연결되는 라인도 항상 구비해 뒀다. 당연히 기본 마이크와 마이크 스탠드도 항상 가지고 다닌다. 이걸 어떻게 다 들고 다녔냐고? 난 덩치가 좀 크다. 내 후임도 덩치가 나처럼 커야 한다.
내가 나팔을 불 때 가장 긴장하는 사람들은 경찰이다. 경찰은 좀 설레발이 심하다. 나팔을 불지도 않았는데 내가 가진 나팔만 보이면 못 가게 막고 둘러싼다. 어떤 때는 내 나팔과 음향시스템을 연결하는 선을 먼저 끊어버릴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나팔을 불면 정리해고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힘을 얻고 끈질겨진다. 그래서 경찰이 싫어하나.
내 나팔과 나팔 시스템이 고장 나면 항상 무상으로 수리해주시고 저렴하게 부품도 갈아주시는 ‘음향 자유’의 이명한 사장님께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가 죽고 새 후임자가 들어와도 지금처럼 아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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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투 방송차 주변엔 항상 경찰과 실랑이가 있다 |
에스코트
내가 항상 가슴에 달고 다니는 전해투 마크는 나의 자랑이다. 경찰은 내 가슴에 달린 전해투란 이름과 내 나팔을 보면 “저 골치 아픈 놈 또 왔구나”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어떤 때는 다른 친구들은 다 보내도 나만 못 가게 한다. 나를 보면 “오늘도 뭔가 평온하지 않게 끝나겠구나” 생각하는 것 같다.
난 경찰이 이해 안갈 때가 더 많다. 내가 수십 번 지켜봤는데 경찰이 유연하게 대처하면 별것도 아니다. 진짜 궁금한 건 왜 경찰은 5분만 기다리면 정리 집회 끝나고 그냥 돌아갈 사람들을 연행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 시발점은 항상 나를 연행하면서 시작된다. 차량 소통을 핑계 대지만 나를 연행하려고 하는 순간 판은 커지고 기자들까지 몰려든다. 이럴 땐 경찰이 우리 편인가 싶다.
경찰은 자주 나를 에스코트해 준다. 작년 세월호 집회 때도 그렇고 1차 오체투지 마지막 날에도 에스코트 해줬다. 그 날은 내 친구와 백형근 전해투 회원이 연행된 날이다. 나도 경찰에 끌려 갈 뻔 했는데 나까지 끌어갔다간 더 난리가 날 까 싶었던지 끌어가진 않고 돌아가라고 했다. 경찰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계속 따라오며 에스코트해 주더니 집 앞까지 따라와 잘 들어가는지 확인까지 해줬다. 내가 그렇게 걱정됐냐.
작년에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현대차 불법파견 관련 기자회견을 끝내고 집에 돌아올 때도 경찰차가 계속 따라왔다. 우린 기자회견 빼곤 아무것도 안했는데 그냥 따라왔다. 남산 순환도로 부근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고 나왔더니 관할서가 바뀌었는지 다른 경찰차가 여전히 따라왔다. 서울 시청 앞까지 따라오자 우리 일행이 경찰차를 잡고 신분증을 달라고 했더니 “위에서 시켜서 했다”는 말만 했다. 왜 우리를 따라왔는지 자기들도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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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오체투지 마지막 날 방송차량 안에 있다 연행된 전해투 백형근 회원 |
네가 아니면 안 돼
나는 희망버스나 오체투지 등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도 가지만, 진짜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곳이 더 많다. 1인 해고 사업장이나 1인 비정규직 사업장, 민주노총 사업장이 아니어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한국노총 해고 사업장 등을 더 자주 간다. 이곳 사람들은 내 지원이 절실하다. 내가 가서 나팔을 틀고 집회를 시작하면 사측의 부담이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작은 사업장 지원요청이 쇄도한다. 외롭고 고립된 투쟁 현장에서 난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촛불 시위 막바지도 그랬다. 처음 촛불이 번질 땐 경찰도 함부로 나팔 단속을 못했지만 촛불이 사그라들 무렵엔 단속이 심했다. 나팔을 달기만 하면 다 끌어가고 심하게 따라다녔다. 그러니 누가 나서려고 하겠나. 결국 내가 선봉에 섰다.
소지품 검사
난 가끔 경찰에게 소지품 검사도 당한다. 내가 가진 물건이 그들에겐 위협이 되나 보다. 하긴 요즘은 그리 심하진 않다. 내가 이곳에 온 초창기만 해도 이런 일이 있었다. 특히 내가 가진 소지품을 대한문이나 청와대 인근에 전달하려고 하면 경찰은 생난리다.
한 번은 쌍용차 노동자들이 대한문에 농성장을 만들려고 할 때 내가 농성물품을 담당했다. 나는 계속 물품을 싣고 대한문 주변을 돌아다니며 물품 반입을 시도했다. 경찰은 나를 계속 따라다니고 대한문 가까이만 가면 나를 고착시켰다. 그 사이 다른 사람들이 다른 방향에서 물품을 넣었다. 그렇게 고착될 땐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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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러진 나팔 |
1차 심정지
힘든 시간 속에서도 나는 건재했고 열심히 투쟁현장을 다녔지만 어느 날 죽음의 전조가 나타났다. 작년에 울산 희망버스를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나가다 톨게이트 직전에서 1차 심정지를 일으켰다. 나는 응급 심장수술에 들어갔다. 수술비는 174만 원이 들었다. 이때부터 나는 고속도로를 타기가 겁난다. 멀리 가다가 또 심정지가 올까봐 서울이나 경기권 밖으론 다닐 수가 없다. 아직도 전국 곳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제 멀리 갈 수 없다.
전조 증상이 나타난 지는 꽤 됐다. 내 상태를 알려주는 계기판이나 센서는 이미 멈춰 있다. 시동을 걸면 소리가 이상할 때가 많다. 정비소에선 고치는 것보단 새 차를 사는 게 돈이 덜 든다는 판정을 받았다.
내가 다닌 거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지만 심장이 망가진 이유는 공회전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에 맞춰야 했고 항상 발을 동동거리며 대기할 때가 많았다. 그러는 동안 많은 노동자들이 잡혀갔고, 많은 노동자들의 눈물을 봐야했다. 공회전도 공회전이지만 마음이 아파 더 견디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내 심장은 곧 정지할 테고 내가 다녔던 곳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투쟁 역사의 한 발자취로 남을 것이다.
부활
나는 부활이 예정돼 있다. 아마 3월 초에 또 다른 내가 탄생할 것이다. 나는 트랜스포머도 꼬마자동차 붕붕도 아니다. 서울 시내를 달리며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타요도 아니다. 나는 그냥 평범한 승합차다. 지금은 전해투 방송차 2호 스타렉스지만 3호는 어떤 차종이 될지 모른다. 부활할 3호를 마련하기 위한 모금은 70% 가까이 이뤘다. 해고 투쟁이나 비정규직 투쟁의 연대확장의 계기로 삼기 위한 모금이라 한 사람이 거금을 내거나 3호를 기증하는 건 거부한다. 8년 전 모금으로 나를 전해투에 데려온 이호동 전해투 위원장은 “이 속도로 모금이 되면 3월에 중고로 구할 수 있고, 목표한 액수를 넘는다면 어렵고 조직적 지원을 못 받는 사업장 투쟁기금에 쓸 예정”이라고 했다.
3호도 나와 비슷한 외모가 될 것이다. 나팔을 달아야 하고, 연대 투쟁하는 사람과 물품까지 실을 수 있는 넓이가 나와야 한다. 3월이면 1호 방송차로부터 이어받은 전해투 정신을 3호 방송차가 싣고 전국을 누비게 될 것이다. 내 후임자를 보거든 지금처럼 경찰로부터 지켜주고 아껴 주시길 바란다. 3호야. 내가 죽거든 부러진 나팔은 꼭 새 걸로 달아달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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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투 방송차 견인 압박을 넣는 경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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