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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실명제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실명제를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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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공산당 금지, 민주국가 독일에 치명적 이력 남겨

“50만명에 영향, 모든 공산주의 대중 및 지역조직들 갈아 으깨져”...현재 진행형

[편집자 주]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 금지로 민주주의와 진보에 관한 우려가 팽배하다. 독일공산당(KPD) 금지 후 이 정치적 판결이 독일 사회에 어떠한 악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지에 관해 독일공산당 금지 50주년을 계기로 독일 법조인이자 인권활동가인 롤프 괴쓰너(Rolf Gössner)가 2006년에 기록한 글을 전한다.


1956년 8월 17일, 50년 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공산당을 금지하고 해산시켰다. 지난 50, 60년대 서독 공산주의자에 대한 박해가 최고조에 달한 암흑의 날이었다. 검찰은 1951년에서 1968년까지 공산주의자 또는 이들을 지지하는 활동가로 의심되는 15-20만 명에 대해 수사절차를 진행했다. 이 중 약 1만 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독일공산당 금지는 직접적인 당사자들 뿐 아니라 이들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쳐 사회적인 억압의 수단으로 작용했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박해는 당시 20년 간 50만 명 이상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 공산주의자에 대한 박해는 70, 80년대에도 공직 금지를 비롯해 반테러조치의 대상으로까지 확대됐다.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독일공산당 금지가 늦어도 냉전이 종식된 뒤에는 해결됐고 더 이상의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판결이 극히 문제적이고 정치적인 동기에 의한 결정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젠 문제가 없다는 이런 식의 견해는 몇 가지 이유에 의해 반박돼야 할 것이다.

  1952년 독일공산당 금지에 반대하는 시위 장면(동독 라이프찌히) [출처: 독일 포토텍]

“모든 공산주의 대중 및 지역조직들은 갈아 으깨졌다”

첫째, 정당 금지는 오늘날까지도 허약한, 이른바 ‘방어력 있는 민주국가’로서의 독일에 이의 이력과 치명적인 영향을 남겼다. 둘째, 정당 금지 그리고 이로써 정당화된 국가 안보를 위한 재판에 불려 나온 공산주의자와 이들 관계자들은 오늘날까지도 복권되지 못했다. 당시 수사와 부분적으로는 구나치가 주도한 소송이 법치국가의 원리와는 전혀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셋째, 힘없는 이들에게 내리친 다모클레스의 검과 같은 이 금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좌파 정당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정치적 계기에 따라 되살아나고 있다.

독일 역사상 비로소 2번째의 정당금지 판결은 성공적으로 관철됐다. 연방헌법재판소는 공산당을 금지하기 4년 전에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SDAP, 일명 나치스)의 후신으로 분류된 사회주의제국당(SRP)을 금지시켰었다. 사회주의제국당 금지는 독일에서 역사적으로 확고한 정당성을 지녔다. 아덴나우어 정부는 1951년 2개의 금지 청구안을 동시에 제출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는 안간힘을 다해 정치적 좌우의 대칭을 지키려는 시도로 보였다. 반공주의가 고조된 서독에서 애초에 적은 좌파였고 이전 나치는 이전에 벌써 국가와 사회에 통합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방어력이 있는 민주주의’는 애초 반나치적인 목표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공산주의자, 반파시즘주의자 등의 좌파 세력에 집중됐다.

독일공산당 금지로 정치적 투쟁의 자유는 비상 사태 속으로 빠져들었다. 판결 후 경찰, 관청과 법원은 이 정당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고 이 정당과 ‘대체 조직’에서 활동한 당원과 동료들을 억압했다. 판결에 따라 대체조직은 “해산된 정당의 위헌적인 입장에 가깝게, 또는 일부, 혹은 최종적인 목적으로, 완전하거나 또는 부분적으로, 단기간이거나 또는 보다 긴 시간 동안, 국부적이거나 또는 초지역적으로, 공개적이거나 비밀리에 계속 추종되거나 추종하고자 하는 개인연합”으로 간주됐다.

독일공산당 금지는 공산주의자, 이들 동맹 관계자와 (추정상의) 동조자에 대한 정치적 재판을 정당화했고 이를 최고 심급 법원 판결로 보장했다. 독일공산당 금지와 정치적 사법부를 통해 모든 공산주의적 대중 및 지역조직들은 갈아 으깨졌다. 공산주의자와 그들 동맹 관계자는 그들 정치의 조직적인 토대를 잃어버렸으며 공개적인 의사결정과정에서 계속해서 배제됐다.

정당 금지 후 억압적 효과 50년 지난 후에도 현재 진행형

우리가 판결문에 따른다면, 금지의 효과는 “기본법이 시간상 그리고 객관적으로 정한 공간에 한정될 것”이다. 판사들은 “독일의 통일과 자유의 실현이 기본법 146조에 따라 새 헌법에 대한 전독일의 결정”을 통해 확인될 경우 (독일공산당에 대한) 금지의 파기를 고려했다. 그러나 통일 독일은 주지하듯 자유로운 새 헌법을 통해 과거를 대체하지 못하고 서독의 것을 따랐다. 이렇게 민주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한 절차는 서독의 기본법이 전 독일 민중을 위한 헌법으로서 간주되도록 했고 이 헌법이 지지하는 법원의 모든 결정도 유효하게 됐다.

이로써 독일공산당 금지는 지배적인 견해에 따라 계속 유효해졌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공산당 금지가 구동독 지역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의미했다.

즉, 독일공산당 금지 판결이 미치는 효과는 말하자면 영원하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상황을 중단하기 위해서는 의회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연방의회는 냉전 시기의 이러한 잔해를 가능한 빨리 극복하기 위해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연방헌법재판소법을 개정하여 정당금지의 기한을 제한하고 해금이 가능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1969년에 이미, 당시 자민당 연방의원으로 외무장관을 지낸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빌리 브란트 총리와 마찬가지로 독일공산당에게 다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서독 내 공산주의자들과 정치적 씨름을 시작하고자 했다. 금지 신청은 정치적 심급의 “재량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에 이 금지에 대한 검토와 해금도 “마찬가지로 재량적인 결정에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산당 금지 50년을 계기로 이를 요구하자. 독일공산당 금지는 해금돼야 한다. 냉전시기의 법적 희생자들은 복권되어야 한다. 구독동 슈타지(동독 국가보안부)의 역사와 서독의 국고금사만이 전승돼서는 안 된다.


[필자]롤프 괴쓰너(Rolf Gössner)는 독일 변호사이자 인권활동가로 빅브라더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정치, 문화와 경제에 관한 반군사주의,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격주간지 <오씨에츠키(Ossietzky)>의 공동편집자이기도 하다.
[원문]http://www.sopos.org/aufsaetze/44f1fc549b66d/1.phtml
[번역]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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