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8월 31일 직장을 그만두고 세월호 유족이 있는 광화문·청운동 농성장으로 왔다. 이곳에서 유족을 돕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활동을 한다. 시민단체나 국민대책회의 지킴이 등 딱히 소속이 없는 그는 사람들의 질문에 “이해리입니다” “저는 백수라 명함이 없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보육원 봉사와 태안 유류 피해 기름띠 제거 봉사 활동이 전부였고, 천주교 신자로 시국미사엔 참여한 적 없는 이씨의 삶을 세월호 참사가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참사가 발생하면서부터 진중하게 고민과 행동을 이어왔던 그는 “미래를 잃어버렸다”고 확신했다.
자원봉사에서 촛불, 직장과 분향소 오가
“수백명이 산 채로...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이씨는 4월 16일부터 안타까운 마음에 기도했다. 점심시간에 동료와 ‘전원 구조’ 소식을 듣고 다행이라 여겼다가, 퇴근 후 ‘오보’ 사실에 기가 막히고 ‘대단히 충격’이었단다.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언론보도와 SNS를 확인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승객을 구조하지 못하는 상황에 암담했다.
“4월말까지 보름간 계속 뉴스 보고, 기도했어요. 잠을 이루지 못했죠. 팽목항에 가고 싶었지만 직장인이라서 마음 먹기 어려웠어요. 구조될 수 있었던 아이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대한민국의 산적한 문제가 터지기 시작하면서 공황 상태였죠. 어둠이 내려 새벽이 넘어가는 시간에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가 하늘인지도 모르는 그곳 배 안에 수백명의 사람이 산 채로 갇혀 있던 것잖아요.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자연재해도 아니고 도저히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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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디어충청] |
이씨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가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았고, 기도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답답하고 속상했다. 하지만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단다. 그러다 희생자 시신이 수습되면서 SNS에서 자원봉사자 모집을 보고 연락해 안산 장례식장에서 하루 봉사를 했다. 그곳엔 단원고 2학년생 6명의 희생자가 있었다. 이씨는 ‘봉사라고 할 것 없이 상 차리고 상 내가는 일’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이씨는 다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촛불집회에 참석했어요. 5월 둘째주 안산에서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을 때, 처음 가봤어요. 그곳에서 ‘아, 이건 내가 참석해야 하는 집회구나’라고 느꼈죠. 청계광장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석했어요. 자각과 깨달음의 연속이었죠. 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퇴근하고 가장 가까운 서울광장 분향소에 가는 일이었어요. 매일 가서 기도했죠. 언론에서 접한 희생자 아이들, 일반인들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말이예요”
6월, 경기도에서 서울로 이사한 이씨는 동네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 참여했다. 서명장에서 일주일에 3~4번씩 조용히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이 시기 유족들은 진상규명을 외치며 350만명의 서명을 국회에 전달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광화문에도 단식농성장이 차려졌다. 이씨는 근무가 끝나면 저녁에 매일 시청 분향소에 가서 기도하고 10분 거리에 광화문 농성장에 와서 서명운동을 도왔다. 농성장에서 어느새 그의 별명은 ‘야간조’가 되었다.
“처음 서명운동을 할 땐, 한 마디도 못하고 피켓만 들고 서 있었죠. 광화문에서도 ‘무언가 돕고 싶다’고 했더니 반갑게 맞아줬어죠. ‘특별법 제정 위한 1천만명 서명 부탁드린다’ ‘안전한 대한민국 만들기 위한 서명입니다’ 등 오느 순간 말문이 열렸죠(웃음). 그때 시청광장에 추모 분향소가 있고, 10분 거리에 부모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단식 노숙농성을 하는 상황이 저에게 굉장히 각인됐어요.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말이 안 되고 비상식적인 상황이죠”
중병 걸린 대한민국서 내가 뿌리 내린다 해도
“중도·중립 유지하려 했지만...자기 위안 아니었을까?”
5~8월까지 서울광장 분향소와 직장을 오가던 그는 직장을 그만뒀다. 이씨는 평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지만, 2008년 광우병 촛불부터 쌍용차·용산참사·강정·밀양 등 어떤 집회에도 참석해 본 적이 없다. 무엇이 그의 마음이 움직였을까. 한국사회의 민낯이 드러난 세월호 참사를 보며 그는 ‘뿌리부터 썪은’ 사회 구조와 마주하게 됐단다.
“그날 이후 시간이 멈췄어요. 왜 할까?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할까? 3개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가운데 ‘왜’ 세월호 참사에 아파하고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진 알았어요. 제 미래를 잃어버렸다고 확신했죠. 전 평소 담백하고, 건강한 사람이 되려면 자기 ‘중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가졌죠. 그런데 총체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해 보이는 중병에 걸린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내가 뿌리를 내리려고 해도 나는 썪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또한 아이들이 죽어가는 시간을 부모가, 가족이 기다리게 한 잔혹하고 끔찍한 참사는 마지막 경고 같았죠.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참사는 계속 일어날 수 밖에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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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디어충청] |
그의 마음을 움직인 다른 하나는 반성과 성찰이었다. 세월호 승객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지만, 자신은 왜 가만히 있는지 생각하게 됐단다. 누구도 자신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이씨는 일상에 묻혀 정치·사회문제는 나 몰라라 하는 개인에게도 이번 참사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저는 평소 한 가지 이슈에 대해 여러 매체의 기사를 봤어요. 나름 ‘정치·경제·과학·문화 등 요즘 무엇이 이슈인지 알아. 달라지는 정책도 아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죠. 결국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았어요. 416참사 겪으면서 ‘내가 대단히 교만하고 착각에 빠져있다’고 느꼈죠. ‘뉴스를 보고 균형있고,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자세가 참사를 막는 데 아무것도 일조하지 못했구나’하고 말이예요. 조금 더 생각해보니 나는 정체성, 주체성도 없이 그냥 숨이 붙어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쳇바퀴를 돌리고 그곳에 머물렀던 거죠. 대통령, 정부관료, 국회의원 등이 하는 일이 못마땅해 관심 갖지 않고, 외면해버린 것이 쌓여 결국 대형 참사를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책임이 있죠”
물론 취직하기 어려운 나이에 안정적인 직장에서 스펙도 쌓고 싶었다. 차츰 노후 준비 해야 하고 누리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당장 오늘 하루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고 집중해서 살기 어려운 데 30년, 50년 후를 대비하며 매여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회사를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 않고, 광화문·청운동 농성장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단다. 세월호 참사로 그의 가치관이 점차 변했다.
“당연히 편하게 살고 싶죠. 돈은 삶을 편리하게 해 주지만 평화롭게 해 주진 않는 것 같아요. 통장에 잔고가 쌓이는 것을 보며 ‘내가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게 이거 다 뭐해?’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미래를 잃어버렸어요. 삶의 시계가 멈췄기 때문에 이를 찾는 게 먼저예요. ‘나 이제 가난해지겠구나’ 하니까 편안해요.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고,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면 쉽게 농성장에 나오기 어려웠을 지 몰라요. 하지만 농성장에 있으면서 세상과 사람 관계를 다시 배워요. 학교-회사-결혼 틀 안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만나죠. 사람의 삶이 통째로 나에게 들어오죠. 나의 삶이 건강한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 같아요”
직장을 그만둬 부모님이 걱정했겠다는 질문에 이씨는 “제가 전략을 잘 짠 것 같아요”하며 웃는다. 그러면서도 딸의 선택을 믿어주는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친구들이 “농성장 가면 밥은 줘?”하는 질문에 “여기오면 맛있는 밥 줘”하고 웃는다. “이제 시집가야지?”하는 질문도 웃어넘긴다. 그는 요즘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도리어 거꾸로 묻는단다. “밥 먹으려고 살아? 좋은 일만 하면서 살 순 없지만 그렇게도 살아지더라고. 아직은 그렇게 살아볼래”.
“엄마, 내가 사고 나면 경기부양 때문에 적당히 진상규명 할거야?”
25일로 세월호 참사 163일, 국회 본청 앞 농성 76일, 광화문 광장 농성 74일, 청와대 앞 농성 35일째다. 농성이 길어지고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공방이 장기화되자 안 돼면 세월호 탓이다. 세월호 때문에 경제가 어렵고, 장사가 안 되는 등 국민이 피해본다는 식의 ‘세월호 피로감’이 제기된다. 이씨는 요즘 세월호 농성장에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든단다.
“아마 저도 세월호 가족께 ‘특별법 제정 안 될 것 같은데 그만 좀 하지’라고 했을 지 몰라요. 이번에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면 말이예요. 비난과 조롱은 하지 않았겠지만, 아무 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길 하는 사람 틈에 끼어있었겠죠. 조금만 생각해보면, 지금 그만두라고 한다면 내가 큰 상처를 입고 고통 받았을 때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해야 하나요? 그만두라고 한다면 당신 손 잡아줄 사람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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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디어충청] |
그는 요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한다. 만일 해리 씨가 같은 참사를 당했다면 그의 부모님도 이곳에 나와 농성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만일 그의 남동생이 같은 참사를 당했다면, 누나인 자신이 진상규명 활동에 나섰을 거라고 말한다. “승객을 구조할 수 있었는 데 구조하지 못한 잘못된 나라” “청와대 앞에 관광객은 가도 유족은 갈 수 없는 이상한 나라”, 더 나아가 “복지정책 없는 나라” “비정규직 해결 못 해 양극화의 나라” “세월호 참사 난 지 얼마 됐다고 규제완화·민영화 추진하는 나라” “배 부른 사람은 계속 배불러지는 데 배고픈 사람에게서 세금 더 걷겠다는 정책을 쓰는 나라”에서, 그는 계속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선택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그의 요즘 질문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요?”이다.
“아이가 커서 ‘아빠,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뭐 하셨어요’ 물으면 ‘나는 농성 그만하라고 했어’ 하실건가요? 아니면 ‘서명은 했어’ ‘리본 100개 만들었어’ ‘생수 사다 날랐어’ 하실건가요? 활극의 무용담을 전하란 얘기가 아니라, 한번쯤 자신에게 되물었으면 좋겠어요. 손자·손녀가 ‘할머니, 할아버지 그때 뭐했어요’ 물으면 ‘개네는 종북 빨갱이야’ 혹은 ‘경기가 안 좋았는데 그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서 내가 그만하라고 했어’ 하실건가요? 그럼 단순한 아이들은 ‘엄마는 내가 사고로 잘못되면 경기부양 때문에 적당히 하시겠네요’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럼 여러분들은 ‘사고가 나긴 왜나! 말이 씨가 돼!’하며 아이들을 혼내실 건가요?”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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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기자는 미디어충청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미디어충청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