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권 노동부 장관은 고용세습 조항에 대해 “청년 구직자들의 공정한 취업기회가 박탈”되고 “노사관계 질서의 훼손은 물론 대기업 정규직 부문의 이기적 행태”라고 비난했다. 노동부는 위법, 불합리한 단체협약이라며, 시정 조치하지 않는 해당 노사는 사법처리 등 강력 대응한다는 입장이다. “최근 청년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인 12.5%에 달하는 등 청년 일자리 문제가 심각해진 상황에서 소위 ‘고용세습’으로 비판받는 ‘우선, 특별채용’ 조항 등에 대한 개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부모 뒤를 잇는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이 아닌, 당연한 듯 세습되는 재벌가 자식도 아닌 일부 대기업 임금노동자들이 ‘현대판 음서제’의 주인공이란다. 노동부 장관의 발언만 두고 보면 ‘자녀가 정규직 부모의 일자리를 물려받는다’는 것처럼 들린다. 한국GM 한 노조원은 “놀고먹는 게 세습이지, 회사에 충성하다 산업재해로 죽어 그 부인이 사내식당에 취직해 새벽부터 밥 짓는 게 세습입니까?”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청년실업의 원인과 상관관계는 외면한 채 ‘귀족노조 이기주의’로 비난하는 소재인 건 사실이다.
노동부 조사와 발표시점의 수상함
노동부는 이미 1년 전 단체협약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지난 해 3월 한국노동연구원에 연구용역을 의뢰한 ‘2014년 단체협약 실태조사(2013년 말 기준, 727개 기업 대상)’ 분석 자료를 발표했다 이어 조사대상을 확대해 4월, 6월, 올해 3월까지 1년 동안 4차례 추가 발표했다. 노동계가 ‘재탕 자료’라고 비난하는 이유다.
또 노동부는 ‘고용세습 조항으로 몇 명의 자녀가 특혜 채용’됐는지 규모는 밝히지 않고 있다. 문제 조항이 개선되면 청년일자리 문제가 얼마나 해소되는지에 대한 내용도 없다. 노동부 관계자는 “회사 인사 기밀이라 우리가 면접 등 인사 과정에 참여하거나 압수수색을 하지 않은 이상 파악하기 힘들며 파악할 근거가 없다”고 이유를 전했다.
통계청 ‘2월 고용동향’에 근거한 ‘청년실업률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 12.5%’에 대해 기재부는 실업률 고공행진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발표했지만 노동부는 고용세습 시정의 핵심 이유로 삼았다. 노동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우선, 특별채용이 위법하다는 하나의 참고 자료이며 실업률 자체에 크게 의미 두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문제되지 않은 조항이 몇 개월 만에 ‘위법 조항’으로 바뀌기도 했다. 노동부는 지난 해 “업무상 재해로 인한 가족의 취업은 사유가 예외적인 경우로서, 취업자 비율이 높지 않아, 제3자의 기본권 침해 정도가 사회통념상 허용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거나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고용세습으로 통칭해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노동부 발표 직후 다수 언론은 ‘취준생이 좌절’한다며 30대 대기업 중 8곳의 명단을 보도했지만, 노동부는 사업장 명단을 따로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노동부는 “지난 해 한번 명단이 나가서 사업장에서 항의 전화가 오고 법적인 문제로 난리가 났다. (조항의 위법 여부는)노동위원회 의결을 거쳐야 하며 명예훼손과 결부될 수 있다”면서도 “조선일보 등이 인용한 명단에서 변동이 없으니 활용하면 된다”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고용세습, 정말 세습되고 있나?
“고용세습 조항 시정된다고 청년고용이 늘진 않아”
언론에 보도된 대기업 8곳을 취재한 결과 정작 노, 사 양측은 고용세습 조항으로 채용된 규모에 대해 “거의 없다”, “많지 않다”,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다. 이를 노동부는 몰랐을까.
현대자동차는 산업재해로 노조원이 ‘사망했거나 장해로 퇴직할 시 직계가족 또는 배우자 중 1인에 대해 결격사유가 없는 한 요청일로부터 6개월 이내 특별 채용하도록’ 단체협약에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 사측 관계자는 “채용 규모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산업재해자 관련 조항이 있는 대한항공은 “단체협약이 생긴 2000년 이후 해당 조항으로 채용된 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사측 관계자가 말했다.
정기퇴직자와 장기근속자 자녀 우선채용 조항이 있는 곳도 비슷하다. 한국GM 사측 관계자는 채용 규모에 대해 “소수 중에 소수 중에 소수”라고 했다. 기아차 사측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은 ‘회사는 종업원 신규채용 시 동일한 조건하에서는 당사 종업원의 자녀를 우선한다’는 조항에 대해 “같은 조건일 경우 우선적으로 한다는 의미이며 채용된 사람은 거의 없다”고 사측이 말했다. 특히 고용세습 조항은 ‘원칙으로 한다’, ‘할 수 있다’고 돼 있거나 ‘채용규정상 적합한 경우’ 등 단서를 붙여 사용자의 인사재량권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한국노총 김준영 대변인은 “단체협약 전수 조사 능력이 있는 노동부가 고용세습 조항으로 몇 명이 채용됐는지 확인할 수 있고 바로 나오는 통계”라면서 “조사하지 않았거나 조사했더라도 규모가 작아 발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단체협약 실태조사를 한 한국노동연구원 박명준 연구위원은 “정부가 위법, 불합리한 단체협약에 대해 일정 정도 권고할 수 있지만 이를 넘어 위법 관행이 심각하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과도하다”면서 “노사관계는 노사 자율, 자치로 풀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고용세습 조항 등이 시정된다고 청년고용이 늘어나진 않을 것이며 이 같은 조항이나 관행이 청년고용을 막는 핵심 이유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사기업의 노동자 기여 및 배려는 고용세습이고 위법, 불합리인가
“노조 혐오를 유발, 조장하고 노동조합을 궁지로 몰겠다는 여론전”
회사에서 일하다가 다치거나 사망한 경우 우선채용으로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는 게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일일까? 박유기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장은 “한국사회는 장애인 우선채용을 법률로 강제하고 국가유공자 채용도 법률로 강제한다. 그런데 법으로 인정한 산업재해로 사망하거나 장애를 입은 노조원 자녀와 가족 채용은 왜 고용세습이라고 비난하고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기여 및 배려 차원으로 보면 국가공무원 채용 시 국가유공자 자녀 등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위법, 불합리한 고용세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기여를 인정하는 정부가 ‘기업 기여에 대한 기업 내 보상은 안 된다’고 나서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애국은 되고 애사는 안 된다’ 식의 논리다.
박명준 연구위원은 “예를 들어 기업이 순직자의 자녀에게 일정하게 채용 우선권을 준다면, 기업 이익에 반하는 데 노조 요구에 굴복한 것은 아닌 것 같다”면서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한국사회에서 기업이 그간 노고를 치하하거나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유도하고, 높은 충성도를 유발하기 위한 하나의 인센티브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정년퇴직자나 장기근속자 자녀에 대해 우선채용도 같은 맥락에서 볼 여지가 있다. 현대차의 경우 20년 전 ‘정년퇴직 또는 25년 이상 장기근속자 자녀에 대해 동일 조건이면 우선 채용한다’는 고용세습 조항이 있었다. 관련해 박유기 지부장은 “제가 입사한 1989년 현대차를 ‘현대구루마’로 부른 시절에는 이직률이 높아 장기근속을 유도했다”면서 “당시 장기 근무자에 대한 예우 차원과 인센티브를 주면서 이 조항이 만들어졌었다”고 설명했다.
청년실업을 걱정하는 정부가 그 원인을 ‘사문화된 고용세습’에서 찾은 결과는 무엇일까? 김준영 대변인은 “노조 혐오를 유발, 조장하고 노동조합을 궁지로 몰겠다는 여론전”이라고 비판했다. ‘40~50대 기성세대가 일자리 지켜 청년일자리가 없다’식 기성세대 혐오, ‘일자리 물려주는 정규직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노조’식 노조 혐오를 유발하는 효과다. “정규직노조가 일자리를 대물림해 쉬운 해고 해야 한다”, “임금피크제 도입해 청년일자리 해결하자”는 정부 추진 노동개혁과도 맞물린다.
김준영 대변인은 “노동 개혁한다며 취업규칙을 불이익 변경하고 임금피크제 도입 등 노조 무력화를 시도하는 정부가 ‘정규직, 대기업노조가 문제’라며 고용세습을 강조해 여론전을 피는 것은 노조 혐오로 몰아가는 매우 정치적인 행위”라면서 “또한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한 책임을 노조 때문에 노동개혁이 안 돼서 그런 냥 탓하고 있다”고 말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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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기자는 미디어충청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미디어충청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