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진보의회정당운동과 관련하여 ‘의회주의’라는 비판 등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진보운동의 한 자산이라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진보정당이 운동정치로부터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정당의 권력이 강화되면 운동정치와의 고리가 끊어지거나 제도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양자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선거-의회 국면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고민택(사노위)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진보운동’의 한 자산이라는 것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문제는 ‘진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다. 현실에서 ‘진보’는 이미 부르주아 정치의 한 요소이며, ‘정치공학’에 활용하거나 ‘세력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즉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진보’는 이미 ‘진보’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노동자계급의 자산이 아니라 점점 더 청산해야 할 부채로 변질되고 있다. 대중의 기대가 아직은 남아 있고 그들이 집권을 통해 그 실상이 폭로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자산으로 삼을 수는 없다. 진보정당은 지난 20여 년에 걸쳐 노동자투쟁이 쌓은 자산을 고스란히 소진시키고 말았다. 심지어 최근 노동자투쟁이 어려움에 처하자 노동자계급과 결별하려고 하거나 기껏해야 관료주의 세력과 결탁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서구 사민주의 정당의 경우와 비교해서도 이미 ‘늙은 정당’이다. 그들은 집권은 고사하고 의회에서조차 미미한 세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정당, 부르주아 정당을 흉내 내고 있다. ‘민주대연합’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민주노동당은 역사를 20년 이상이나 후퇴시키고 있으며, ‘진보대연합’을 주장하는 진보신당은 그 자체가 변형된 ‘민주대연합’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정치적 실체 자체가 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들 정당을 대상으로 의회정치와 운동정치의 고리나 관계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가 없다.
질문의 요지가 의회정치와 운동정치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라고 할 때, 먼저 그러한 구분 자체를 쉽게 하거나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구별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문제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제도와 비제도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아니 배타적이 돼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체제의 한계를 말하기 전에 이미 대중정치가 성립된 정치지형에서 의회를 버리거나 무시하고는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 이는 의회에 진출할 것이냐의 여부나 의석수의 정도가 어떠냐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정세에 따라 의회를 지나치고 곧바로 권력 장악을 향해 나아갈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의회는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 지점은 아니다. 그러나 의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력이 될 수 있어야 의회를 횡단하는 것도 가능하다. 선거-의회 국면도 계급투쟁의 주요한 장이다. 지금의 실상은 노선 때문이 아니라 능력과 역량의 한계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상태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이에 대한 답은 운동이 훨씬 더 커져야 하고, 강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없는 역량으로 사회운동도 하랴, 진보정당도 만들어서 의회정치도 하려니 너무도 힘에 부치는 모습이다. 의회는 한계도 있지만 대중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는 데는 매우 유용한 장이라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의회정치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인식보다는 그 장을 충분히 잘 활용할 수 있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의회정치의 유용한 틀을 인정하면 보다 적극적으로 의회정치 내로 진입해서 그 틀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사회주의 정당운동이 민노당이나 진보신당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것은 운동사회를 벗어나면 그런 존재들이 있다는 것조차 대중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 앞에 제대로 한 번 서 본 적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누구는 현재의 사회운동이 정당운동으로 전화해야 한다고 한다. 거기에는 제도적인 틀 내에서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대중들에게 대안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주문한다. 이런 전략이 일정한 긍정성을 갖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운동은 놓아야 할 것인가. 사회운동은 더욱 광범한 정치적 풀을 형성해야 한다. 진보정치의식으로 각성된 대중들을 사회운동은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발전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가 소중하니 어느 하나를 놓자고 해서는 안 된다. 운동정치의 힘이 강력할 때 진보정당도 운동전략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힘이 우리에게 있는가. 의회정치의 틀에서는 늘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현실적인 선택에 영향을 미치니 못하는 운동의 힘의 한계부터 어떻게 넘어설까가 우리 고민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심광현(문화과학)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관계가 선순환 관계를 이루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양자관계를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양자가 선순환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서는 현실적인 사회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치경제적 거시 체계의 변화와 일상생활 현장의 미시적 변화가 항구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정당운동이나 사회운동 모두가 전자의 변화를 추동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고, 시민운동의 일각에서는 후자의 변화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정당운동이 생활현장과 분리되게 되면 선거 때에만 대중과 접촉하게 되고, 사회운동은 자기가 필요한 대중시위를 조직할 때에만 대중을 동원하려는 편향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중의 입장에서는 몇 년에 한 번 접촉하는 정당조직이나 사회운동조직이 낯설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반면에 생협운동이나 공동육아와 같은 일상 사업에만 매몰되는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일반 시민들은 목전의 생활상의 편익에 대해서는 관심을 공유하고 참여하지만 거시적인 정치경제적 체계의 변화가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과 그로 인해 정치경제적 체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 이렇게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이 일상생활과 분리될 경우, 전자의 운동은 의회에 참여하든 아니든, 자의든 타의든 ‘대표자 운동’이라는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87년 체제’와 ‘97년 체제’의 이중운동 속에서 고통에 시달린 대중이 불신하게 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대표자 운동’의 허구성이다. 물론 ‘대의(간접) 민주주의’ 자체가 모두 불필요한 허구라는 것은 아니다. ‘직접 민주주의’와 연결되지 않고 공중에 뜬 대의민주주의가 허구적이라는 것이며, 이런 허구의 병폐를 대중은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 여실히 체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회주의적 정당운동인가 아니면 의회 밖에서의 사회운동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정당운동은 선거 국면과 비선거 국면을 연결하는 일이, 사회운동은 시위 국면과 비시위 국면을 연결하는 일이 무엇보다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에만 매몰되던 차원에서 벗어나 후자를 중시하고, 전자에서의 성과를 후자에서의 노력의 산물로 획득하려는 태도의 근본적 변화가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정당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선거나 시위와 같은 예외적 국면이 아닌 통상의 시간과 공간 대에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대중과의 접촉면적을 늘리는 일이 무엇보다 관건이라는 것이다. 즉 일상생활에서 대중과의 상시적 접속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생활정치를 발굴하고, 확장함으로써 그 탄탄한 대중적 지지 기반을 통해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을 확대해 나가려는 자기혁신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중의 집> 운동은 이와 같이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이 함께 만나서 체계의 문제와 생활의 문제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의 인식을 일상적으로 공유하면서 대안적인 체계와 생활양식을 만들어 갈 수 있을지를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고민하며 상호부조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생활프로그램을 실험해 나가는, 일상에 뿌리를 내리려는 생활정치의 새로운 프로그램의 한 사례이다. 그러나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은 기존의 관행에 젖어 이와 같은 실험의 가치와 의의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여력이 없어 출범한 지 2 년이 되었지만 충분히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진경(수유공간N)
그보다 먼저, 제도정당과 운동정치가 고리를 갖고 ‘좋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질문해야 할 듯하다. 운동정치의 조직적 결정이나 요구를 제도정당이 받고 실행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 만약 그런 것이라면 제도정당은 운동정치의 ‘전달벨트’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 ‘운동정치’가 정파를 뜻하는 것이든, 민주노총 같은 ‘대중조직’을 뜻하는 것이든 간에. 그게 아니면 운동정치의 강령을 선전하고 확산하는 것? 이는 레닌 식의 고전적 모델에 더 가까운 것 같지만, ‘전달벨트’로 설정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느 경우든 제도적 진보정당에 권할 만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수용해서 잘 될 것 같지도 않다.
제도정당과 다른 조직의 운동정치가 독자적인 것만큼, 제도적 진보정당의 운동정치 역시 독자적인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제도정당‘과’ 운동정치의 관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제도정치‘의’ 운동정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왜 제도적 진보정당은 제도의 논리에 말려드는가를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제도정당이 제도권의 논리에 말려들고 그것에 의해 침윤되는 것은 제도정치에서 요구하는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서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부르주아지가 짜놓은 판에서 제도화된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한, 승패는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다. 자신에 불리한 게임의 규칙 때문에 항상 패배하거나, 아니면 게임의 규칙에 적응하면서 게임에 불리한 애초의 목표를 하나 둘 접어가는 것. 제도권에서도 진보정당이 승리하려면 게임의 규칙을 따르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협상의 방법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선 아직 협상의 상대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으며, 진입한다고 해도 직접적 이권이 달린 문제에서 협상을 어떤 것을 관철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모호한 경계지대에서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은근슬쩍 만들어 가동시키는 것, 혹은 물리적인 힘을 갖는 것으로 만들어 좋든 싫든 그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사례는 집권과정에서의 노무현이었던 것 같다. 제도정당에서 어떤 지위도 주지 않았지만, 새로운 종류의 대중을 창조함으로써 대중과 정당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 것; 자신이 해보나마나 질 게 뻔한 정당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게임의 규칙을 따르는 게 아니라, 정당 바깥에서 새로운 종류의 대중조직과 결합하여 그들의 힘을 정당 내부의 게임의 장으로 밀고 들어간 것; 제도적 정당들이 법적 규칙을 빌어 밀어붙인 탄핵 같은 사태조차 대중들의 힘으로 밀쳐내버린 것 등등.
노무현의 실패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집권한 이후 그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기를 중단하고, 합법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게임의 규칙에 따라,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 거대언론사 등의 적들을 다룸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규칙의 게임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관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기 보다는 기존의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면서, 자신의 의도나 말로 설득하려고 했다. 그의 언행은 애초부터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게임의 규칙을 바꾸지도 못한 채 적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고, 그 결과 게임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을 더욱더 공고하게 만드는 결과를 야기했다. 후기에 가서는 스스로 그런 게임의 규칙에 매여 관료들, 게임의 규칙의 집행자(Trigger)에 포박되어 그들의 대변인이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노무현의 사례에서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게임의 규칙을 넘나들거나 새로 끼워 넣기 위해선 대중을 창출하고 장악해야 한다는 점, 그런 대중을 창출하는 새로운 정치의 스타일이나 신뢰, 혹은 애정을 얻어야 한다는 점, 그것을 통해 기존의 규칙들을 무력화하거나 그것들을 밀치고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들어가는데 성공한 뒤에도 결코 게임의 규칙에 매여선 안 되며 자신에 유리한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끊임없이 창안하고 가동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창안하다는 것은, 그것과 결부된 새로운 대중을 창출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대중을 기존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새로이 모여들게 만드는 새로운 어트랙터(매력!)를, 새로운 특이점을 만드는 것이다.
사실 대중들은 이미 ‘정치판’에 무관심해질 정도로 기존의 정치에 물려 있다는 사실, 즉 기존의 게임의 규칙에 물려있다는 사실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적극적인 요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문제는 기존의 제도적 정치에 싫증난, 아니 짜증난 대중들을 기존의 제도정치의 규칙을 따라서 모으고 ‘장악’하려는, 결코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일 것이다. 새로운 게임의 규칙, 그것은 기존이 제도정당과 경쟁하는데서 사용하거나 끼워넣는 게 아니라, 대중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대중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창안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규칙이나 관행을 넘어서 새로운 ‘매력적’ 스타일의 정치를 창조하고 실천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이는 적지 않은 시간을 투여하고 기다리는 것을 필요로 한다. 노무현의 경우에도 새로운 스타일로 인한 실패로 십년을 보낸 것이, 나중에 가시화되어 드러난 것이다. 지수함수적 성장은 초기의 ‘지루한’ 기다림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선거나 의회 국면에서 요구되는 진보정당의 태도는 이런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선거를 단순히 ‘선전의 장’으로 생각하는 것도, 혹은 다른 제도정당과 같은 규칙에 따라 경쟁해야 할 장으로 생각하는 것도 결코 승리할 수 없는 길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 전혀 다른 스타일의 정치를 대중에게 가시화해야 할 국면인 것이다.
장훈교(성공회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 사회(변혁)운동 진영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의회주의’라는 비판은 ‘의회’와 ‘비(非)의회’의 대립에 기초해 있고,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의 대립은 이것의 변형이다. 물론 이것은 오래된 형태의 대립인 공산주의(혹은 코뮌이즘)-사회(민주)주의, 혁명-개혁이라는 이분법의 전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대립은 격렬한 논쟁을 수반하였고, 사회(변혁)운동의 역사는 이러한 갈등에 대한 입장들의 조직화의 역사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이 이분법과 관련된 갈등의 강도와 폭은 매우 크고, 넓다. 따라서 오래된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의 중요성을 주창하는 것이 분화되고 파편화된 운동의 역사적 현실 혹은 그 역사적 배치로부터 유리된 주장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에서 살펴본 [적-녹-보라]동맹의 문제 또한 부분적으로는 이 문제의 연장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우리들이 생각하는 한국 급진 민주주의운동의 기본 전략은 기존에 존재하던 ‘이것인가 저것인가’라는 다양한 형태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 현 단계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제안한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이분법을 ‘이것인가-저것인가’(either-or) 접근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 단계에서 우리들의 입장을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한다면, 이것과 저것 모두(both-and)를 특징으로 하는 접근을 택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우리들의 권고가 여러 형태의 다양한 요소와 전략들이 기초하고 있는 기본적인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한 철저한 성찰 없이 절충하는 방식으로 끌어들이는 단순한 혼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 급진 민주주의 연구모임의 출발 자체가 이러한 (1) 이분법의 탈피 (2) 동시에 절충주의로의 귀결이 아닌 (3) 새로운 형태의 종합을 제시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제안하는 것은 때로는 조화될 수 없는 다수의 상이한 시각들로부터 새로운 어떤 것을 창출하고자 하는 시도로 우리가 나아가는 접근을 택하자는 것이다. 우리들의 바람은 이 새로운 시각이 이전의 입장들이 지닌 지식과 통찰을 보전하지만, 그 입장들과는 차이나는 대안들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임시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비판적인 전략-다원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정치정당(political party)에 대한 우리들의 접근은 ‘정치정당’을 보다 강력하게 운동의 이론 안으로 통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정치정당에 대한 논의는 최소한 ‘국가’와 ‘정치’가 등치되는 국면을 넘어선 현대 운동정치의 지형 위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와 정치는 등치되지는 않지만 국가는 권력 혹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조직화된 폭력]으로서 다양한 형태의 권력과 관계를 맺고 있는 동시에, 전체로서의 사회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유일한 장치이다. 우리는 이러한 장치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고, 이러한 장치의 변형과 사회의 변형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여 사고하고 실천해야만 한다. ‘전체로서의 사회’를 변형하려는 전략이 아직 한국의 진보진영에 요청된다면 우리는 현재 운동의 주어진 조건 하에서 정치정당 없는 사회운동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정치가 정당정치체계로 환원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동시에, 사회운동의 자기한계를 인정하고 정치정당을 다시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정당과 사회운동의 대안적인 접합의 관계를 창안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정당에 대한 이러한 입장에 대한 ‘오해’와 ‘우려’가 존재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들은 사회를 변형하는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우위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것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치권력은 (1) 운동으로 조직화되지 않는 다수의 비시민들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 형태이자 (2) ‘정치체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비국가적 자원들을 재분배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 형태이다. 다양한 형태의 권력관계에 내재된 배제와 폭력으로부터 인간의 능력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그 권력관계가 재생산되는 사회적-자연적 조건들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점에서 권력관계 그 자체의 변형이 정치권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권력관계들의 재생산의 조건들의 변형에 정치권력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정치정당-노동운동-사회운동]의 대안적인 접합을 통한 정치블록의 형성이 ‘비시민’들과의 대항블록을 형성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주어진 민주주의의 체계를 ‘거부’하거나 이것을 조직화된 폭력으로 소멸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현재의 조건 하에서 정치정당이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비시민들과의 특권적인 동맹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정당은 정치체계의 내부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정치체계 고유의 힘에 노출되기 때문에 자신의 동맹관계를 해체할 압력에 노출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반대의 조건을 창출하는 대안전략이다. (1) 정치정당이 정치체계의 내부에서 실현 가능하고 효과적인 형태로 다른 정치정당들과 경쟁할 수 있는 조건과 (2) 정치정당-노동운동-사회운동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조건의 공통성을 찾아야만 한다. 사실 이것 자체가 현재 사회(변혁)운동의 최대 과제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질문2 진보운동은 현재 대중들에게 명확하게 제시하거나 국민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명확한 슬로건이나 프레임을 창출하고 있지 못하다. 이에 대해서 평가해 주시고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이를 제시해 주시기 바란다. 더불어 현재 노동운동은 진보운동의 핵심 동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이 현재의 변화된 국면에서 주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특히, 탈노동사회로의 전망이나 신자유주의적 포섭과 관련하여 제시해 주시기 바란다.
고민택(사노위)
현 정세에서 ‘명확한 슬로건이나 프레임’은 ‘자본주의 철폐, 사회주의 건설’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몇 가지 쟁점이 있다. ‘시기상조론이나 토대구축론’을 말하는 경우다. 시기는 이미 실기했다. 적어도 96~97 투쟁 동력이 남아 있고, IMF 위기에 부딪쳤을 때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분명한 정치적 방향과 지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전주의,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이 있다. 지금 운동과 대중이 겪고 있는 최대의 어려운 점은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사회를 인정하고는 그 어떤 요구도 쟁취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있다. ‘시장과 국가’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대중에게 있는 현실을 그대로 말해야 한다. 그로부터 대중이 스스로 판단하게 해야 한다. 엘리트주의는 대중을 대신해 자신이 그들의 역할을 위임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컨텐츠가 없거나 부족’하다는 제기가 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을 준비하고 갖추어 나가기 위해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늦추면 늦출수록 상황은 더 어려워 질 뿐이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운동을 전면화, 대중화하는 것이 유일한 타개책이다. 매우 현실적으로 말하면 사노위를 성공시켜야 한다. 사노위가 성공한다고 해서 운동 전체가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사노위가 실패하면 운동 전체는 당분간 다른 대안이나 타개책을 별도로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사노위의 역량이 어떠냐를 묻기 전에 사노위만이 현 시점에서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을 전면에 내걸고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실제로 바닥이 어딘지 모를 만큼 침체되어 있다. 전체 운동이 활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역으로 이것이 바로 노동운동이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87년 이후 성장한 노동운동의 한 국면이 이제 마감되고 있다. 노동운동의 새로운 국면은 오직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운동으로부터만 열릴 수 있다. ‘진보정당’은 오히려 넘어야 할 대상이 되어 있다. ‘불법파견 판정’에도 불구하고 두 진보정당은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G20 대응 투쟁’을 앞에 두고도 그 어떤 정치적 긴장도 형성하고 있지 못하다. 민주노동당은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 진보신당은 어디로 향할 지 방향조차 정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노동운동이 침체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진보정당의 상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진보정당을 강화해서 노동운동과 노동자투쟁을 되살리고자 하는 프로젝트는 이미 실패했다. 물론 노동운동과 노동자투쟁이 살아나지 않고 진보정당이 힘을 발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악무한 관계를 끊어내야 하는 것이 현재의 긴급한 과제이다.
‘진보의 재구성’을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그 모두의 공통점은 사회주의를 피해거나 우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금의 위기는 분명 주체의 위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운동 상층부의 위기이며, 지도력의 위기다. ‘탈노동사회’도 노동운동의 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탈노동사회’는 현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계급에게 돌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탈노동사회’가 아니라 ‘탈노자관계’ 사회여야 한다. ‘탈자본’ 없는 ‘탈노동’은 성립될 수 없다. ‘탈노동’을 통해 ‘탈자본’을 이루자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계급을 포섭하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결국 억압과 분열의 기제를 작동함으로서만 유지가 가능할 뿐이다. 역사상 자본이 노동자계급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경우는 이른바 ‘복지국가’가 유일한 경우다. 그 외에는 오직 탄압과 배제만이 있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덜 나쁜’ 것을 강요/강제하는 체제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는 무너지고 있다. 직접적 권력행사를 통해 노동자계급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자본과 국가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위기 전가는 단지 생산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유통과 소비 과정, 일상과 문화 영역에까지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 노자대립, 노자적대는 더 이상 공장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공장이 모순이 발현되는 최전선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의미로 봐야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 생태, 인권을 후 순위로 밀쳐놓고는 제대로 된 주체 형성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공장에서 사회로’라든가,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은 모두 사태의 본질을 비껴난 설정이다. 당사자/정체성/소수자 운동을 노동자계급이 함께하지 않으면, 특히 조직노동자 본령에서 발현하지 않고는 그들 운동은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한국진보운동은 노동운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지 않을까. 노동운동중심주의라고나 할까, 이런 것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형성되는 주체들을 변혁운동의 주체로 삼으려는 사고는 별반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렇다고 노동운동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노동자계급은 역사적으로 결코 하나인 적이 없었다. 이해관계로 분열되는 것이 노동자계급이었고, 그것을 지배세력들은 매우 잘 활용해서 통치해온 것이 아니었던가(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역설한 것은 단결하지 못하는 노동자계급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 아닐까).
이제 대공장 노동자들은 거의 중산층적인 사고와 의식, 문화, 생활에 젖어 있으면서도 악착스럽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키면서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동안 일을 한다. 민주노총의 노동자들이 민노당을 찍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을 변혁운동의 주체, 노동운동의 핵심으로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지배세력에 포섭된 중산층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조끼를 입은 비정규직들을 부리면서 상전노릇을 하고 있으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득권을 한껏 누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결국 노동운동의 핵심대오를 새로이 형성해야 한다. 그것은 비정규직, 실업자일 것이다. 물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하고, 아니 나아가 단결하기 위한 노력에도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에서도 비정규직과 실업자를 중심에 세우고, 조직하려는 노력을 배가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할 방도가 사실은 별로 없다는 게 문제다. 부당하게 해고를 당해도 싸우려는 결심을 하기에는 너무도 현실의 벽이 높고 견고한 반면에 진보운동의 연대의 힘은 일시적이거나 미약하다.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실의 고통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가야하고, 그럴 때 장투사업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데 주체들이 결심하지 못한다고 타박할 수도 없다.
노동운동의 주체 형성에서 비정규직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해결해야 진보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이 된다. 그런 움직임이 먼저 노동운동 주체들 사이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야 하며, 그럴 때 사회적 지지와 연대가 힘 있게 형성될 것이다.(왜 질문지에는 ‘국민’이라는 표현을 쓸까?).
심광현(문화과학)
현재 진보운동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분오열되어 있고, 지난 50 여 년 간의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화에서 누적된 내적-외적 모순의 중층결정에 대한 인식 공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몇몇 예외적 시기를 제외하고는 ‘이름에 값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전체 국민은커녕, 부문적 이슈와 관련해서도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명확한 슬로건이나 프레임을 창출할 능력이 부재한 형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직시해야 한다. 이런 문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 처방이 필요하다.
첫째, 우선 세계사적 이행이 시작되는 오늘날과 같이 체계의 카오스적 요동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한 두 마디의 매력적 슬로건이나 반짝이는 프레임이 아니라 국내외적 체계들의 거시적 구조 변동과 나비효과를 야기하는 미시적인 행위 간의 복잡한 변증법의 역동적 궤적에 초점을 두는 중장기적 시각에서의 심층적인 연구가 시급하다.(전략적 씽크탱크의 시급성)
둘째, 다른 한편으로는 침체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혁신하기 위한 시급한 조처들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거시적 프레임의 재구성만이 아니라 일상적 운동 방식 자체의 시공간적 리프레이밍이 시급하다. 다시 말해서 노동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간헐적인 시위나 파업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국면에서 평일과 주말, 낮과 밤, 작업 현장과 여가 공간 등에서 다면적으로 활동가와 대중의 접속 면적을 늘리는 적극적 생활정치의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경우에도 <민중의 집>과 유사하게 상호부조적인 방식의 문화교육과 생활협동조합 프로그램의 적극적 활용할 필요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일상적 차원에서의 생활정치를 80년대의 의식화 운동 같은 계몽주의 운동으로 오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과거의 야학운동이나 공동체적 문화운동과는 크게 다르다.
(1) 오늘의 정규직 노동자 대중은 과거보다 훨씬 극심하게 물신화된 자본주의적 소비주체로 바뀌어 있다. 노동자의 자율성과 자립성이 점점 더 축소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비자본주의적 생활주체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지 의식의 변화만이 아니라 비자본주의적인 상호부조의 방식으로 의-식-주의 나눔과 더불어 이미 증대된 문화적 향유와 여가 시간에서의 자기실현을 비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내기 위한 새로운 방식의 적극적인 감성적-지적 나눔의 운동이 필요하다.
(2) 다른 한편 늘어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대안이 없기 때문에 당장 고용시장으로의 복귀에 대한 열망이 크지만, 상호부조적 문화교육생활협동조합과 같은 대안을 체계적으로 마련한다면, 불안정한 노동시장에의 종속을 벗어나 자립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진경(수유공간N)
먼저, 슬로건이나 프레임의 문제는 레이코프의 말대로 우리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선거에서의 슬로건의 문제만은 아니며, 단지 슬로건만의 문제도 아니다. 슬로건이나 언어적 프레임에 관한 것으로 말하자면, 지금 진보진영에 유리한 것이 없다는 말을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가령 지금 ‘4대강 사업 중단’은 국민대중의 막대한 부분이 지지하는 슬로건일 뿐 아니라, 운동단체를 초과하는 자발적인 대중적 개입의 장이 되고 있다. 이는 또한 이명박 정부나 건설개발로 경제를 떠받쳐온 한국의 부르주아 체제의 근본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로선 물러서기 힘들지만 말을 하거나 싸울수록 불리한 이슈 아닐까?
이를 ‘유리한 프레임’으로 보지 못하고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 진보진영은 이렇게 유리한 프레임을 자신의 영역 바깥으로 밀쳐두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자신들이 시작하지 않았기에 해봐야 소용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민중의 호민관’이 될 것을 설파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고전적 가르침조차 잊어버린 것일까? 이 문제를 좀더 적극적이고 좀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싸울 수 있다면, 이처럼 좋은 ‘슬로건’이나 프레임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실제로 환경운동연합은 두 개의 보를 점거하는 근 두달간의 투쟁을 통해, 새만금 투쟁 포기 이후 상실한 신뢰를 급속히 회복하면서, 대중운동의 중심으로 빠르게 밀고 들어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또 이명박이 제시한 ‘공정사회’라는 개념 또한 내가 보기엔 자신들로선 결코 지킬 수도 없고 외양조차 유지할 수 없는 턱없는 슬로건을 제시한 것이며, 이는 말할수록 자신들의 발목을 잡거나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그런 프레임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장 김태호 등의 임명을 둘러싼 투쟁에서, 모든 항의와 비판을 씹는 무대포의 전술조차 통하지 않는 결정적 패퇴를 해야 했던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명박 자신이 공정사회라는 슬로건에 반하는 지반에 서 있고, 그 주변에 있는 자들 또한 다르지 않기에,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입으로 공론화했기에 반정부진영에서 받아 요구하는 것을 피할 수도 없는 자멸적인^^ 슬로건 아닐까?
하지만 이 역시 진보진영에 유리한 프레임이나 슬로건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슬로건은 외친 자들의 것이고 그것을 들고 싸운 결과는 그들에게 귀속된다는 생각 때문일 걸까? 이런 생각이라면, 진보진영이 외칠수록 불리해지는 그런 슬로건이나 프레임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데 프레임의 문제는 단지 슬로건의 문제는 아니다. 사고의 프레임, 혹은 정치적 대결의 프레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비판적 지지’ 이래 반복되고 있는 ‘단일화’의 프레임이다. 선거 때마다 진보진영은 ‘승리를 위한 단일화’인가 ‘패배하더라도 끝까지 가는 독자후보’인가라는 프레임에 사로잡혀왔고, 이번 6월의 선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사실 이런 프레임에서 처음부터 승자는 정해져 있다. 적과 대결하는 장에서 ‘승리를 위한’이 항상 목적으로 암묵적으로 달라붙는 단일화의 논리를, ‘패배하더라도(패배하겠지만!)’ 단일화를 이해해달라고 하는 말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이는 ‘단일화’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처음부터 지고 시작하는 게임이다. 이는 표현이란 층위에서 보면 슬로건의 문제지만, 조직적 층위에서 보면 기왕의 지배적인 이항적 대립구조에 진보진영이 제3항으로 추가되는 관계의 프레임이기도 하다. 여기서 제3항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선, 다시 말해 이항적 대결구도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출구를 찾지 못하는 한, 단일화논리에 매번 욕먹으며 패배하거나 아니면 아예 미국식 양당대결 구도로 가자는 ‘현실론’으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이는 진보정치 자체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다.
다음으로, 탈노동사회로의 전망 속에서 노동운동의 문제. 산업혁명이 육체노동을 기계화하는 프로세스를 진행시켰다면, 포드주의적 노동의 체제는 어셈블리 라인을 이용해 결합노동을 기계화하는 프로세스를 거기에 결합시켰다. 그것이 포드주의라고 불리는 ‘축적체제’(이 개념을 반드시 조절이론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를 떠받치는 기술적 조건이었다. 그런 컴퓨터와 사이버네틱스의 발전으로 시작된 소위 ‘정보통신혁명’은 한편으로는 정신노동을 기계화하면서 자동화된 기계들이 공장에 들어서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이란 표현형식을 통해 정신노동 차원의 결합노동을 기계화함으로써 ‘노동자 없는 노동’의 착취를 향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었다. 이후 보급된 인터넷과 정보통신망은 생산과 유통, 소비를 하나의 단일한 과정으로 연결함으로써, 유통과 소비마저 생산과정의 일부로 포섭했다. 그리고 실시간의 정보적 처리를 바탕으로 노동대상이나 생산수단, 그리고 생산물의 흐름을 시장에서의 욕구에 맞추어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유연성의 축적체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인터넷을 통한 대중의 욕구의 변화에 생산이 직접적으로 연동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인터넷은 동시에 대중의 욕구의 변화속도를 가속하고 생산물의 비교평가를 용이하게 하여 자본간의 경쟁을 강화했다. 이는 유연성이 자본의 피할 수 없는 생존조건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유연성이 생산수단이나 생산물 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유연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력의 유연성, 그것은 그때마다의 생산이나 시장의 변화에 따라 노동자들의 고용이 ‘유연’해짐을 뜻한다. 이것은 그때마다 필요한 한에서 쉽게 고용하고 쉽게 해고하는 고용형태를 확대시켰고, 이것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속한 증가로 이어졌음은 잘 아는 바와 같다.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다시 정규직으로 되돌리는 것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 같다. 한때 긍정적인 뉘앙스로 명명되던 ‘포스트포드주의’의 개념이 있었지만, 포스트포드주의 내지 포스트-케인즈주의 축적체제란 포드주의 내지 케인즈주의가 한계에 봉착하면서, 다시 말해 2차 대전의 대대적인 파괴로 인해 가능했던 20년 정도의 자본의 벨에포크가 끝나면서 출현했던 것이며, 새로운 잉여가치의 대대적인 창출이 불가능한 한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인 것이다. 이는 지금의 자본주의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정규직화의 요구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지금의 자본가들이 그것을 수용할 능력은 없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와 관련된 노동운동의 방향이 ‘정규직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즉 그것은 불가능한 것의 요구를 통해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자본을 그 한계 저편으로 밀어붙인다는 의미를 가질 수는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보인다. 따라서 실질적인 생활조건을 고려한다면, 그보다는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인 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비정규직 노동을 줄일 수 없다고 해도,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 노동이 ‘싸게’ 평가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차라리 반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따라서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과 해고수당과 실업수당을 확대하면서, 비정규직인 채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모색되어야 한다. 더불어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삶의 조건을 고려할 때, 노동하지 않아도 생존의 최소조건은 사회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basic income)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조건을 확보하는 것은 단지 생활의 불안정성을 해결하는 소극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노동하지 않는 시간의 확대를 노동 아닌 자유로운 활동으로 대체함으로써,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새로운 포텐셜을 가동시킬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에서 해방된 ‘주체’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안하고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조건이 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장훈교(성공회대)
일단 검토해야하는 것은 진보운동에 국민적인 차원을 고려할 수 있는 이론적인 자원이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동시에 [국민-차원]에 대한 문제설정과 [시민-차원]에 대한 문제설정은 동일한 문제 지평이 아니다. 급진 민주주의 프로젝트는 (1) 질서로부터 배제된 다양한 형태의 하위주체들에 대한 차원과 함께 (2) [시민-차원]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을 견지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민 → 시민 → 국민]으로 전유하는 메커니즘에 대항해서 [국민 → 시민 → 인민]의 역과정을 창출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소수자들과 약자들은 자신이 위치한 권력관계 내에서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권력자원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권력관계 외부에 위치하는 타자들과의 공동실천을 조직해야만 한다. 이 차원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시민-차원]입니다. 따라서 급진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입장에서 [시민-차원]은 타자들의 능력을 해방하기 위한 연대와 종합의 과정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진보운동에서 [시민-차원]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것은 다양한 권력관계의 내부에 놓인, 혹은 그로부터 발생하고 있는 갈등들과 타자들을 결합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르게 말하면 다양한 현장의 투쟁이 사회로부터 고립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민-차원]의 내부로 진입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지배하는 상식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상식의 한계선 내부에서 그 상식의 변형을 요청하는 사회에 대한 우리 모두의 자이이해를 변형시키는 투쟁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식에 대한 투쟁은 (1) 우리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한 직관주의적인 이해에 기초하고 있고 (2) 그것과 결합된 필요와 욕망 (3) 그리고 사회적 상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슬로건이나 프레임에 대한 진보운동의 요청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개념과 이론의 부과를 통해 사회를 설명하고 그 설명을 통해 비판하는 전통적인 좌파운동의 설명을 통한 비판으로서의 자기 능력에 대한 회의가 대중민주주의의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일련의 회의주의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슬로건과 프레임의 문제는 보다 일차적으로 지금 진보운동과 좌파가 [시민-차원]의 내부에 정치적인 균열을 도입하고 그것을 통해 대안적인 정치전설을 구성할 갈등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과정이다.
반MB전선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그 전선이 ‘상식 Vs 비상식’이라는 문제를 자신의 내부로 통합시켰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이명박 정권이 상식 이하라고 보이는 것입니다. 반MB전선은 곧 균열되겠지만, [상식 Vs 비상식]의 균열은 아직 유동적인 차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균열을 자신의 내부로 통합하는 정치집단이 다양한 갈등을 상식과 비상식의 균열과 중첩시켜 제시할 능력을 얻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개념이기 때문에 개념을 통해 반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가 ‘자본주의’에 반대하지만 개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과 연결된 사회적 상상과 투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의 위기’가 우리들의 삶의 위기를 가져오는 중심적인 문제라는 측면에서 우리들의 삶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노동의 새로운 사회적 조직화에 대한 요청은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노동-없는-시민]은 자신의 사회를 박탈당하고 오로지 주어진 질서에 즉각적으로 동조하고 반응할 수밖에 없는 동물화된 개인들로 전락할 위험성에 직면한다. 이러한 조건이 노동운동의 사회적 기반을 확장하는 과정에 결정적인 객관적인 한계로 작동하고 있다.
노동의 위기는 노동 그 자체의 위기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위기라는 차원에서 즉 사회적인 차원에서 정의된다. 나는 질서의 내부로의 통합을 욕망하지만 동시에 그 질서의 내부에서 주변화되는 과정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객관적 기대와 주관적 삶의 실현 사이에는 매우 강한 마찰과 갈등, 불화가 발생한다. 우리들의 삶은 지배의 일부인지 저항의 장소인지 그 자체가 불명확한 식별불가능한 장소로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 사회적 삶의 식별불가능성의 증가가 잉여성을 관리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정책을 국가가 끊임없이 생산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불안과 공포의 지점이다. 저는 신자유주의로의 포섭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식별불가능성의 장소로서의 우리들의 삶에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질문3 이제까지 좌파진보운동은 중앙정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역에 주목하는 논의들이 많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역공동체운동이나 다양한 대안운동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아울러 지난 지자체선거를 포함하여 세대 간의 문화적·가치적 변동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기존 진보세력은 이런 세대 변화에 주목하지 못함으로써 노령화를 겪고 있는데, 이번 지자체선거를 포함하여 세대 간의 문화‧가치변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 바란다.
고민택(사노위)
‘좌파진보운동이 중앙정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진단도 실상을 제대로 본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좌파진보운동’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그 대상이 불분명하지만 모두를 뭉뚱그려서 하나로 말할 수 없으며, 일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적인 행태를 중앙 집중으로 말하는 것도 적합하지 않다. 그럴 경우 그 대안이 마치 ‘지역공동체운동이나 다양한 대안 운동들’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지역공동체운동이나 다양한 대안 운동들’ 내에서도 얼마든지 나쁜 의미의 중앙 집중적 현상이 있을 수 있다. ‘중앙정치에 집중’하는 것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정확히 논증해야 한다. 사실은 그 반대다. 오히려 ‘중앙정치에 집중’하지 못하고 각개약진 했던 것이 오늘의 현실을 낳은 중요한 하나의 원인이다. ‘중앙정치에 집중’할 수 있는 정도의 지도력과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무정형하거나 우연적인 ‘지역공동체운동이나 다양한 대안 운동들’의 양적 연대를 통해 변혁을 꾀할 수 없다. 그들 운동도 성장하면 결국 정치적 집중을 통하지 않고는 운동을 지속시켜 나갈 수 없다. ‘지역공동체운동이나 다양한 대안 운동들’도 ‘조합주의’ 경향으로 빠질 우려가 충분하다. 그 속에서도 종파성이나 패권성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경계를 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역공동체운동이나 다양한 대안 운동들’을 펼쳐나가야 할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문제는 그것을 하기 위해 중앙 집중을 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지역공동체운동이나 다양한 대안 운동들’을 활성화하고 실제화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당 운동이 성립되어야 한다. 설령 그와 무관하게 형성된 것들도 결국 당 운동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와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 20~30대가 보여준 투표 성향을 포함하여 세대 간의 문화적?가치적 변동을 말할 수는 있다. 한국사회에서 세대 전체가 하나의 집단적 경향을 보인 것은 이른바 ‘386 세대’다. ‘386 세대’는 분명 공통의 정치적/문화적 특징을 보유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386 세대’는 자유주의 정권의 등장과 진보정당 운동 태동시킨 모태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그들의 동질성이 분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 위기가 끼친 영향 때문이다.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 나타난 20~30대 역시 문화적·가치적 차원에서 일정한 동질성을 보여주었다. ‘반이명박’으 표출이 그것이다. 그 바탕에는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세대’, ‘청년실업 세대’로 상징되는 현실이 자리 잡고 있으며,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표출된 것이다. 이를 추상적인 문화적·가치적 변동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다만 그들 세대가 성장한 정치적·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렇다고 주체 형성이나 변혁 운동의 초점을 세대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지금까지 보아온 민주화의 성과는 그 토대가 매우 취약해서 정권이 한 번 바뀌는 것에 따라 한 번에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을 보고 있다. 민중배제의 민주주의의 결과이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결과다.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면서는 소유구조가 더욱 강고해지고 있다.
운동의 토대를 강화하고, 근본부터 바꾸자면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기본은 대중들이 살고 있는 생활현장에서부터 운동의 토대를 쌓고, 역량을 키워내고, 훈련된 이들에 의해 정치적 힘이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지금껏 지역은 풀뿌리운동의 전유물이었고, 변혁운동세력들은 지역을 외면했다. 지자체 선거가 놀랄만한 결과를 낳았다지만 지역의 정치구조는 여전히 보수세력들이 독점하고 있다. 지역에서부터 보수정치를 제끼고 대중들의 지지를 모아내기 위한 방안들을 찾아야 한다. 지역을 튼튼한 거점으로 만들어내고, 그 힘으로 중앙정치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기본이 아닐까.
문화적, 세대적인 변화의 흐름은 급격하다. 반면 좌파운동의 주도세력들은 늙었고, 낡았다. 새로운 세대들은 과거 80년대 식 조직문화나 동원되는 문화는 철저히 거부한다. 촛불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연히 보았다.
반면에 그들은 운동의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표 한 장이라도 자신이 직접 선택하고, 직접 던지고 싶어 하지 누구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이미 인터넷 등을 통해서 진보운동진영의 활동가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갖고 그 정보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줄 안다. 이런 새로운 세대들이 좌파운동을 외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20대를 조직하겠다는 한나라당보다도 이런 변화된 새로운 세대들과 호흡하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제 다양한 전선, 다양한 진지, 다양한 가치,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상정한 뒤에 이를 어떻게 네트워크 해야 하나는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단일한 통일전선은 그것에 제대로 형성되었을 때 갖는 위력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상이다.
훨씬 더 열린 사고와 유연한 사고, 유연한 문화적 태도가 요청된다. 거기에 인권운동에 강조하는 모토가 적용될 수 있겠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다. 차별하지 않고 그 차이를 인정하면 그들의 사고와 가치, 문화를 존중하고 그에 맞는 유연한 조직방식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광현(문화과학)
그간 좌파 진보운동이 중앙정치에 집중해 온 대신 지역정치를 간과해 온 것은 그간 거시적 정치경제적 체계의 변화에만 주목하면서 일상적 생활현장에서의 행위자의 변화는 주목하지 못해 온 것과 쌍을 이루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좌파진보운동 스스로 지역사회에 뿌리 내리는 <민중의 집>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교육생활협동조합운동, 자율적-협동적인 주체형성을 위한 새로운 지역공동체 운동의 모델 개발과 운영에 적극 참여하면서, 당장의 거시적 성과를 바라는 그간의 아비투스를 버리고 중장기적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준비하는 새로운 태도를 취해야 한다.
좌파진보운동의 ‘노령화’는 분명 세대 분화와 관련된 현실변화와 연관이 깊다. 이 문제는 앞서 분석했듯이 좌파진보운동이 그간 거시적 정치경제의 체계에 대한 비판과 대응에 주력하는 대신 자본주의 체계 전체를 변화시킬 새로운 주체 형성을 위한 노력은 소흘히 해 온 것과 직결된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갈 새로운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그에 적합한 태도와 프로그램을 형성해 나갔어야 하는데, 당장 그때그때 운동에 헌신하는 주체의 입장에 서서 변화하는 젊은 세대의 고민과 욕망은 물론 세대 분화에 따른 새로운 아비투스와 감정구조는 무시하고 당위적인 방식으로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해 왔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들어 좌파진보운동의 주축은 4.19세대-유신세대-386세대 정도로 한정되어 재생산이 중단되고 있는 데 반해, 신세대-IMF 세대는 기존 운동의 아비투스와 충돌함과 동시에 IMF 이후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되어 운동에서 멀어져 자기-보전을 위해 허덕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08년 촛불항쟁을 기점으로 촛불세대의 저항이 서서히 감지되고 있어 좌파진보운동의 이념적-감성적-실천적 혁신이 이루어질 경우 촛불세대 차원에서 새로운 대중운동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상당히 커지고 있다. 또한 표류하던 신세대-IMF 세대 역시 최근 들어 '2MB' 정부의 반민중적 정치와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이에 대한 강한 저항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역시 향후 진보운동의 새로운 대중적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데, 이런 가능성은 이번 ‘6.2 지방선거’에서 현실화된 바 있다. 맑스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간 좌파진보운동의 성과와 한계는 거칠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1) 성과
(1) 이론적 차원에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비판과 한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분석에서 일정한 연구 성과를 이루어냈고, 90년대 이후 ‘TNA' 이데올로기의 세계적 확산에도 불구하고 단절을 넘어서 어느 정도 확대 발전에 이를 수 있었다.(2003년 맑스코뮤날레 창립)
(2) 실천적 차원에서는 비록 대중적 영향력은 적었지만 조직적으로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단절을 막아내고 지속적인 비판적 개입 활동을 전개했다.
2) 한계
(1) 이론적 차원에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넘어서는 대안적 생산양식의 구성과 이를 위한 대안적 주체형성의 이론 구성에 이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맑스주의 내에서도 정파와 분파 간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80년대 말 90년대 초 사이에 대학과 지식 공론장에 절대적 우위를 누리던 좌파진보이론의 헤게모니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왔다. 더구나 좌파진보이론 연구자들 스스로 분과학문적 아비투스를 극복하지 못해 맑스주의적 통합연구는 제대로 실행된 바가 없어 현재와 같은 상태로는 통합적 차원에서의 역사적 평가는 물론 미래변혁 전략의 과학적 구성 역시 요원한 실정이다.(이런 대안적인 통합적 전략연구의 부재가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는 자본의 관점에서 거시적-미시적 국가운용 전략과 정책 및 기업발전 전략을 통합적으로 연구하는 삼성경제연구소의 현실적 영향력과 대비해 볼 때 쉽게 알 수 있다)
(2) 실천적 차원에서는 파업과 대중시위라는 예외적 국면을 제외하고는 일상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대중과의 접속 면이 부재한 상황을 방치했고, 그 결과 일상생활에 기반 한 진보적 대중운동과 생활정치의 형성에 실패했으며, 일시적인 예외적 국면을 제외하고는 이로 인해 대중조직의 확대 재생산에도 실패해 왔다. 이는 곧 좌파진보운동의 경우 아직까지 제대로 된 대중운동이나 대중정치를 이루어내지 못해 왔음을 뜻한다.
이진경(수유공간N)
먼저, 좌파 진보운동이 운동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저런 경로를 거치긴 하지만, 결국 사람들, 민중들의 삶을 바꾸는 것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혁명 또한 이를 위한 것이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 또한 이를 위한 것이 아닐까?
물론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 전반적인 변혁을 꾀한다는 구상을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국가권력과 관련된 제도 등의 변화가 무의미하다거나 국가적 포섭의 일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차라리 반대의 지점에 있는 것 같다.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전면적인 변혁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면, 국지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바꾸려는 운동은 ‘자신들만의 게토’를 만드는 무의미한, 혹은 개량주의적인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보는 그런 생각에. 그러나 국가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이, 대중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변환시키거나 그들의 자발적인 운동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단지 권력 주변의 자리들을 차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기보다는 무력하게 겉돌거나 심지어 그에 반하는 조치들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 소련이나, 성격은 다르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보여주는 것 아닐까?
국가권력은 국가권력을 가동시키는 논리와 규칙이 있는 것이고, 따라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순간, 그 논리와 규칙 자체를 전복할 정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선거로 집권한 정부가 그와 관련해 멀리 나아간 사례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장악한 권력은 민중의 삶을 그다지 크게 변화시키지 못하거나 심지어 나쁘게 만들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는 게 어떨까? 국가권력의 장악이란 다양한 자발적 공동체나 자치체, 자율적 집단들의 형성을 촉진하고 촉발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역으로 그러한 자발적 집단들의 구성, 대중들의 운동을 통해 국가권력의 논리와 규칙을 넘어서 권력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런 식으로 중앙정치와 ‘지역적 공동체’나 자율적 조직들의 관계를, 국가권력과 지방권력의 관계를, 사회주의와 코뮨주의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런 관점에서 가령 제도적 정당운동 또한 당분간은 무망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정치로만 향하는 통념적 사고틀에서 벗어나, 동시에 ‘지역적 정치’를 그저 ‘지방자치’라는 나이브한 관념으로만 간주하는 통상적 사고틀에서 벗어나, 중앙과 지역을 횡단하며 양자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진보정치를 포위하고 있는 오래된 프레임을 혁파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 진보적 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세대간의 문화적 차이는 단지 세대간에 있기 마련인 그런 차이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무엇보다 70년대나 80년대를 살아오며 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감수성과 90년대 내지 2000년대라는 전혀 다른 조건 속에서 정치나 경제, 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감수성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나 2000년대를 살면서 운동을 하거나 그런 경향을 갖는 사람들, 혹은 촛불시위를 비롯하여 2002년 이후의 대중운동을 경험했던 사람들, 그래서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젊은 사람들조차 80년대를 살면서 운동했던 사람들과 아주 다른 감수성을 갖고 있다. 가령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집회나 시위란 어떤 경우에도 ‘재미’와는 무관한 심각한 것이었고, 좋든 싫든 앉아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를 사는 젊은 사람들의 경우, 재미없는 것을 억지로 앉아서 지켜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어떤 일도 재미가 없으면 하지 않으려 한다. 반면 시위조차 재미가 있으면 참가하기도 하고, 가능하면 재미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80년대의 ‘진보적 운동’을 한 사람들에게 이런 태도는 진지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따라서 80년대 세대가 주도하는 집회나 시위가 2000년대 세대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미 2002년 이후의 대중운동에서 80년대의 세대가 2000년 세대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자연스런 것처럼 보인다. 이는 세대간의 단절이라는 의미만 갖는 게 아니라, 80년대 세대가 주도하는 운동이 새로운 세대의 대중을 끌어들이지 못할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운동에는 미래가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대중의 진지하지 못함을 비판하거나(심지어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대중은 있어봐야 쓸모없다는 식으로 자위한다고 해도, 그 운동에 미래가 없다는 사실은, 새로운 세대를 진보적 운동으로 끌어들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대중이 여기 있다면 여기서, 저기 있다면 저기로 가서 해야 하는 것처럼, 대중이 감수성이 달라졌다면, 그리하여 다른 방식, 다른 스타일의 운동이 아니면 다가갈 수 없다면, 운동을 주도하려는 사람들 자신의 감수성과 스타일, 사고방식이나 운동방식을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대중의 감수성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찾아내거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대중의 감수성에 다가가고 그 감수성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런 대중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고 그 흐름을 타고 무언가를 할 수 없다면, 진보운동이 자신의 이념이나 신념, 혹은 희망과 분노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해도 운동은 별로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훈교(성공회대)
급진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주요한 문제의식 중의 하나는 ‘사회주의의 재발견’에 대한 요청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흐름은 (1) 국가사회주의로 귀결된 동유럽모델이나 (2) 사회민주주의라는 서유럽 모델과는 구별되는, 그것과 늘 경쟁하여 왔지만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다양한 형태의 대안적인 공동의 질서를 아래로부터 구축하고 그것을 연결하고자 하였던 일종의 ‘분권적인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모델이다. 이 모델의 핵심적인 개념은 ‘연합’(association)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 모델은 일종의 아키즘(archism; 혹은 국가주의)모델과 구별되는 아나키즘(anarchism)모델과 매우 높은 친화성을 갖고 있다.
급진 민주주의 프로젝트는 ‘연대성’을 핵심적인 프로젝트의 개념으로 제안하고 있는데, 이는 나의 대안적인 삶의 구성을 위한 전략이 타자들의 해방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대안적인 삶의 구성의 위한 다양한 실험들을 실현하는 것과 함께 그 실현을 위한 조건의 확보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이런 고민에서 급진 민주주의가 제안하는 개념이 우리들의 협상권력(bargaining power)이라는 개념이다. 우리는 우리를 제약하는 구조로부터 우리의 능력을 실현하기 위한 구조로 구조의 변형을 가져오는 행위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을 끊임없이 구축해야만 한다.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기존 질서의 내부에서 대안적인 질서의 구성을 위한 자원들을 확충하면서 기존 질서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우리들의 권력을 ‘협상권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포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양한 형태의 지역공동체운동이나 대안운동 그리고 중앙정부와 구별되는 지역정부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각각이 차지하는 역할과 위상은 상이하겠지만, 각 모델은 우리들의 협상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자원으로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운동을 공동의 해방을 위한 일종의 ‘공통경제’로 만들어야 한다.
이번 지방선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진영에서 공개적이고 전투적인 형태로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 정당민주주의체제 하에서 ‘선거’가 다양한 정치집단들에 미치는 영향을 다시 한 번 고민할 수 있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세대’를 통한 접근에 회의적인 접근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세대’를 한국 사회의 다양한 현상과 갈등들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접근한다면, 즉 “무엇이 ‘세대’를 통해 정치적인 것들을 정치로 구성해내는가?”라는 질문으로 접근한다면 유의미한 접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직면해 있는 문제는 (1) 억압이나 착취, (2)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무시와 같은 전통적인 진보진영의 중심적인 문제가 아닌 삶이 이 사회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실패’에 대한 문제이다. 이 ‘실패’를 개인의 무능력으로 바라보는 보수주의자들과, 실패를 공적규칙으로의 통합을 통해 형식적인 평등으로 치환하려는 자유주의들과 대항하여 우리는 이 실패를 새로운 삶의 능력의 실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성의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가에 한국 진보주의자들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향후 ‘30년’을 지배할 또 다른 전국화된 갈등과 직면하고 있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