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를 반대한다. 이 기사는 논쟁중
인터넷실명제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실명제를 반대한다.

 

공직선거법 제82조6에 의하면, 선거시기에 실명확인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인터넷 언론사에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그러나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는 국가가 인터넷 언론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검열이자, 익명성에 바탕한 표현의 자유와 여론 형성의 권리를 침해합니다. 정보인권 단체로서 진보넷은 선거시기에도 네티즌이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할 수 있도록, 실명제를 거부한 인터넷언론의 기사들을 미러링하고 그에 대한 덧글란을 선거기간 동안 운영합니다. 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

이 게시판을 통해 전북 참소리, 미디어충청, 민중언론 참세상, 울산노동뉴스의 기사와 관련된 토론을 직접 하실 수 있습니다.

 

[인권오름] [인권단어장] 일터괴롭힘

할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니 들었더라면

A: 너무 속상하다. 뉴스를 보지 않고 살 수도 없고, 내가 안 본다고 그런 일이 안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B: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그 청년 노동자의 죽음 때문이지?
A: 내가 그 나이 때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으며 펑펑 울었는데, 이런 일이 아직도 벌어지다니.
B: 나중에 <전태일 평전>으로 바뀐 그 책 말이지?
A: 한 사람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했고 한 사람은 ‘갓 졸업한 공고생 자르는 게 청년 일자리 정책인가’라는 피켓을 들었고…….
B: 빤히 보이는 위험 앞에서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어 목숨을 위협받아. 실제로 목숨을 잃는 일이 너무 자주 벌어져. 말할 수 없기에 사람이 너무 쉽게 죽고 다치는데, 뭐가 ‘첨단’을 달린다는 거지? 사람대접이 구석기 시대인데 첨단의 시대엔 도대체 누가 살고 있는 거야?

A: 그놈의 일자리의 위계만 날로 심해지고 있지. 일을 하면 다 같은 노동자인데, 거기에 등급을 매겨 신분제도처럼 만들어버렸어. 첨단시대가 아니라 거꾸로 신분제 시대야.
B: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선 작업할 수 없다’고 ‘말을 할 권리’가 왜 일하는 사람에게 존중되지 않을까?
A: 그러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임금 보장이 물질적 존중이라면 노동자의 목소리 존중도 중요해. 일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도 존중받아야지. 노동자가 자기 일에서 통제력과 재량을 발휘할 수 있고 동료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말이야.
B: 그분들이나 숱한 노동자들이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않는 것 아닐까? 위험을 외주화하지 말라고, 필수적인 노동을 불안정한 상태로 내몰지 말라고, 나 홀로 근무를 방치하지 말라고 오래전부터 말해온 것 같은데…….

인격 살해의 목격자

A: 부인을 못하겠네. 나부터 말을 안 할 뿐 아니라 듣지도 않으려고 했어. 나부터가 입을 열 상황이 못 돼. 나는 요즘 인격 살해의 현장에서 늘 목격자이고 방관자인 것 같아.
B: 인격 살해? 뭔 무시무시한 말이야?

A: 요즘 내 직장 상황이 그래.
B: 그래도 너는 안정적이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잖아.
A: 남들 보기에 번듯한 직장이라지만, 속으론 곪는다 곪아.
B: 왜 그러는데? 일이 너무 많아 지쳐서 그래?
A: 단지 ‘지친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 같아. 뭐랄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랄까.
B: 무력감?
A: 맞아. 무력감! 딱 그 단어다.

B: 너처럼 열심히 사는 애가 무력감이라니?
A: 최근 사무계약직을 몽땅 자르는 거야. 근데 대부분이 숙련도가 높고 이곳을 아끼는 분들이야. 나도 일하면서 이분들에게 많이 의지해왔거든. 그분들 일은 원래 정규직이었는데 비용 절감한다고 몇 년 전 무기계약직으로 바꾸더니 이번엔 아예 물갈이한다고 단기계약직으로 바꾼다는 거야.
B: 해고는 아니네.
A: 명목상 그렇지. 하지만 사실상 제 발로 나가라는 거나 마찬가지야. 다들 굴욕감과 배신감에 떨면서 짐 싸고 있으니까.
B: 비용절감이니 경영합리화니 그런 말로 그러는 거지?
A: 그러게. 사람을 비용취급밖에 안하니. 내 방에 계신 한 분은 평생직장이라 생각하고 헌신해왔는데 먹고 살 걱정보다 배신감이 더 크다고 우시더라구.

B: 속상하겠다. 근데 네가 왜 무력감을 느껴?
A: 그런 부당한 일의 한복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안 그래도 내가 평소에 따박따박 따진다고 관리자 눈치가 장난이 아니거든. 요즘은 쓸 데 없는 것들로 괴롭혀. 괜한 절차와 서류를 만들어서 자기한테 부러 결재 받으라고 하고. 안 해도 되는 일 만들어 시키고. 그 사람과 실랑이하면서 진이 빠져. 그 와중에 동료들이 짐 싸는 걸 멍하니 지켜보자니 사는 맛이 없다.
B: 나는 괴롭힘이 사회적으로 나쁜 일자리라 불리는 직종에서만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너처럼 번듯한 직장에서도 그렇구나.
A: 하는 일과 역할이 다를 뿐인데 신분에 의한 위계질서가 있는 양 굴면서 힘으로 찍어 누르는 상황에서 일해야 하잖아. 나야 직급과 권한이 있으니 막 대하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힘들게 해. 그런데 다른 업무를 보는 사람들에겐 정말 막 나가. 쥐꼬리만한 월급, 과다한 업무도 힘들겠지만 그런 인격모독은 숨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아. 그걸 지켜보는 나는 인격살해의 현장에 서있는 거고. 결국 목격자이면서 방관자인 거지.
B: 말도 해 본 사람이 하고 말을 하는 걸 당연시하는 환경이어야 할 수 있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길들여져 온 걸 생각해봐. 그냥 묵묵히 착실히 따르라고만 하잖아. 그게 우리에게 모욕과 경멸을 가르치더라도 말이야.

일터란

A: 이 답답한 상황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부당해고, 성폭력, 노동 재해……, 노동 문제로 말할 문제야 넘치고 넘치지. 그런데 지금껏 써온 이런 말로는 콕 짚을 수 없는 미묘한 갈굼이 있어.
B: 미묘한 갈굼?
A: 예전 같으면 그냥 잘랐을 거야. 그러면 부당해고라고 따져볼 수라도 있지. 그런데 지금은 ‘너는 하찮은 존재다’, ‘얼마든지 싼 값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자꾸 주는 거야. 아주 모욕적으로 들들 볶아. 그래서 제 발로 나가게 만들어. 내 동료들이 처한 상황처럼 말이야. 이런 걸 짚는 말은 없는 걸까?

B: 뭐, 요즘 언론에선 ‘직장 괴롭힘’ ‘직장 내 괴롭힘’이란 말이 많이 나오잖아.
A: 내가 직장에 다니지만, 직장이란 말로는 성이 안차.
B: 왜?
A: 시도 때도 없는 전화, 카톡, 이동 중이건 뭐건 어디서건 늘 접속해서 응답해야 돼. 퇴근해도 퇴근이 아니야. 교육이나 연수, 팀워크 훈련이란 이름으로 필참 해야 하는 행사도 넘치고 말이야.
B: 하긴 요즘 일이란 걸 옛날 연속극에서나 나오는 사무실, 매장, 공장에서만 하는 게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일터 아닌 곳이 없지. 또 다른 문제도 있는 것 같은데. ‘직장’이라고 하면 거기 소속된 사람만의 문제 같은데, 직장 있는 네 문제가 직장 없는 나 같은 사람의 문제와 별개라고 하기가 좀 그렇네. 취업준비생, 실습생, 인턴, 실업자, 자영업자, 소비자 등이 모두 일터와 관계가 있어. 근데 직장이라고 하면 직장 안 사람들만의 문제로 보일 수 있겠네.

A: 또 다른 문제도 있어. 고용주 갑질 뿐 아니라 소비자 갑질도 문제지. 자기 직장에서 깨진 노동자가 딴 곳에 가서는 다른 노동자에게 진상을 부리기도 하지. 저임금에 야간노동과 초과노동을 감내하는 노동자가 많을수록 알량한 일자리도 줄어들지. 싸고 고분고분하게 쓸 수 있는 한 명이 있으면 고용주는 두 명을 쓸 일이 없지.
B: 그럼 직장 말고 일터라고 하는 건 어떨까?
A: 일터? 야, 이렇게 괴로운 공간을 일터라고 하면 왠지 오글거리지 않냐?
B: 일과 관련된 위험의 원천이 되는 모든 장소와 시간, 그리고 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말이 될 수 있어. 그리고 공동의 터인 만큼 같이 살아가며 같이 바꿔나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일터’라고 하는 거야.
A: 그럼, 너도 일터의 주인공이네.
B: 그렇지. 나처럼 공식적인 직장이 없는 사람도 엄연히 일이란 걸 엄청 많이 하고 있거든. 그런데 사람들은 고용된 노동이 아니면 일한다고 취급해주질 않아.
A: 그러게. 너나 나나 일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B: 그래도 돈 번다고 밥은 네가 늘 사잖아? 후후.
A: 고용된 직장에서의 노동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일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갈 때야. 그런 의미로다 너와 나는 ‘일터’로 연결되는 거네.

문제는 권력격차, 권력 불평등이다

B: 그럼, 같이 괴로운 건가?
A: 하지만 나는 층층시하, 겹겹의 위계 속에서 일하는데 너는 네가 좋아서 하는 일만 하잖아.
B: 하하, 내가 부러울 때도 있구나. 그런데 일터에서의 괴롭힘이란 걸 뭘까? 네가 말한 미묘한 갈굼이란 것 말야. ‘괴롭힘’이란 말의 어감이 좀 그래. 그냥 자기가 불쾌하고 불편하면 죄다 괴롭힘이라고 할 것 같아.

A: 너랑 나랑 티격태격하는 걸 갖고 괴롭힘이라고 할 수는 없지. 사실 엄청 괴롭긴 하지만.
B: 뭐?
A: 농담이야 농담. 너와 나처럼 대등한 관계에서 다툼과 갈등이 있는 건 당연지사야. 티격태격할 수도 있고 장난을 칠 수도 있지.
B: 그거랑 괴롭힘은 뭐가 다를까? 경계가 너무 희미한 것 같아. 사소한 갈등이 사생결단 낼 싸움이 될 수도 있고 웃자고 한 장난이 모욕이 될 수도 있고.

A: 핵심은 권력격차, 권력의 불평등이지.
B: 권력 격차?
A: 우리 어렸을 때 시소놀이 많이 했잖아. 올라갔다 내려갔다, 시소 타듯이 아웅다웅하며 지금까지 왔지. 괴롭힘의 관계는 전혀 달라. 괴롭힘의 가해자와 표적에게는 권력 차가 있어.
B: 권력 구조는 아주 복잡하잖아.
A: 그렇지. 공식적인 권력 구조에서 위계나 지위가 낮은 사람이 괴롭힘을 당하기 쉬워.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작용하는 권력도 무시 못해. 실력자의 친인척이라거나 낙하산 인사이거나 등등. 그러니까 괴롭힘은 그냥 성격이 나빠서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드는 그런 게 아니라 일터에서 권력관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걸 지목하는 거야.
B: 흔히 피해자더러 용기를 내서 저항하라고 하잖아?
A: 그게 말이 쉽지. 일터에서의 권력 불균형이 얼마나 심한 줄 알아? 권력 격차를 문제 삼지 않고 괴롭힘 당한 사람의 개인 성향 탓으로 돌리는 게 젤 속상하고 억울해. 사실 괴롭힘 당하는 사람 중엔 나처럼 ‘고분고분하지 않다’, ‘복종적이지 않다’는 이유가 많을 걸.

갖은 방식으로

B: 도대체 어떤 식으로 괴롭혀?
A: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어. 동원할 수 있는 방식은 다 동원된다고 볼 수 있어. 경영전략으로다 대놓고 생산성 향상전략으로 포장된 괴롭힘 정책을 쓰기도 하고, 아무래도 직장이니까 업무와 관련된 괴롭힘이 많아. 그리고 업무는 사람이랑 하는 거니까 대인간 괴롭힘이 당연히 붙어 다니지. 저질 중의 저질은 뭘 집어 던지거나 부수고 때리고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심리적‧정서적으로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괴롭히기도 해.

B: 딴 건 쉽게 예상이 가는데 은밀한 방식은 뭐야? 예를 들면?
A: 내 상사 같은 경우엔 필수적인 정보를 전해주지 않거나 단 둘이 부딪칠 때는 인사를 안 하고 무시해. 딴 사람 앞에서는 큰소리로 인사하면서. 또 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내곤 해. 나랑 친하게 지내면 불이익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은근히 만들고.
B: 아이고. 관두라고도 못하겠고 버티라고도 못하겠고. 정말 힘들겠다.
A: 아까 말한 것처럼 무력감이 밀려들 때가 젤 힘들어. ‘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뜨리는 게 그쪽의 가장 큰 목표인 것 같아서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 거야.

B: 너에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란 말은 절대 안할 게. 먹고사니즘을 강조하는 게 저쪽을 돕는 것 같아.
A: 맞아. 내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다’ 하면 저쪽이 되려 그걸 이용해먹는다니까. 명백한 가해자에 대해서도 ‘먹고 살려다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누구 신세 망칠 일 있느냐, 조용히 지나가자’ 식으로 먹고사니즘을 들고 나와.
B: 먹고사니즘 말고도 일터괴롭힘을 방조하는 통념들이 많을 거야. 그런 것들부터 허투루 보아 넘기지 말아야겠어.
A: 나는 지금 내 직장에서 일터괴롭힘의 목격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해. 또 어디 가서는 가해자일지도 모르지. 겪으면서도 이게 도대체 뭔지 이 괴롭힘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겠어.
B: 어떤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 개념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뭘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하다더라. 일터괴롭힘의 개념 정의도 따져봐야겠지만,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넘쳐나는지 뭘 해야 할지 궁리해보자.
A: 아플 때 병명과 증세라도 알면 위안이 되잖아. 또 병에 대해 사람들이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면 힘이 되잖아. 일터괴롭힘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 뭐가 뭔지 모를 이 고통에 사람들이 이름을 불러주고 통증에 공감해준다면 좋겠어. 적어도 ‘왜 아프냐?’, ‘그까짓 것 같고 그러냐?’, ‘더 힘든 사람들이 천지다’는 식으로 타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B: 나부터 이름을 불러줄게. 또 뭘 할까? 우리 뭘 같이 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말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

의견쓰기
덧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