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를 반대한다. 이 기사는 논쟁중
인터넷실명제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실명제를 반대한다.

 

공직선거법 제82조6에 의하면, 선거시기에 실명확인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인터넷 언론사에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그러나 선거시기 인터넷 실명제는 국가가 인터넷 언론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검열이자, 익명성에 바탕한 표현의 자유와 여론 형성의 권리를 침해합니다. 정보인권 단체로서 진보넷은 선거시기에도 네티즌이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할 수 있도록, 실명제를 거부한 인터넷언론의 기사들을 미러링하고 그에 대한 덧글란을 선거기간 동안 운영합니다. 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실명제 반대 행동 참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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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뉴스 24호-다림질] 홈리스를 혐오하는 사회에서홈리스를 혐오하지 않는 법

[다림질]은 홈리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확대하는 문화를 ‘다림질’해보는 꼭지입니다.

무엇이 안타까웠던 걸까?
얼마 전 한 신문기사에 중구청장의 인터뷰가 실렸다. 중구에 역사가 담긴, 스토리 있는 관광명소들을 개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는 서소문 공원을 역사문화공원으로 만드는 사업도 있었는데, 기사를 읽다가 ‘뜨악’했다. 사업이 추진된 배경 때문이다. 서소문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은 원래 한 추기경이 제안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기독교의 성지인 서소문 공원이 ‘노숙인들의 잠자리로 전락’해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였다고 한다.
안타깝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무엇이 안타까웠던 걸까? 머릿속에 두 가지 경우가 떠올랐다. 달리 갈 곳이 없는 노숙인들의 처지? 아니면, 본래 ‘성지’라는 곳이 노숙인들에게 개방된 곳은 아니라서? 후자의 생각이었다면 정말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노숙인의 처지를 안타까워한다고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노숙인들을 ‘허락받지 않고 들어온 불청객’ 정도로 규정한다면, 노숙인을 냉대할 수밖에 없다. 공원에서 내쫓아야 할 존재들에게 예수님이 말한 사랑을 베풀 이유가 있겠는가?
물론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단지 추측만 해 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홈리스의 삶을 비웃고 경멸한다. 모두가 홈리스를 너무도 쉽게 ‘패배자’로 낙인찍고, 아이들은 그걸 보면서 자란다. 아이가 크면 아마 보고 자란 어른과 똑같은 어른이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되는 거야.”와 같이 훈계하는.

공원의 비둘기와 같은
우리는 홈리스들을 혐오스러운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건 아닌가? 말로는 같은 ‘사람’이고, 같은 사회 구성원이자 ‘시민’이라고 하지만, 실은 공원의 비둘기들을 무섭다고 피하거나 더럽다고 쫓아버리듯이, 그들을 ‘혐오’하는 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흔히 홈리스 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보다는, 눈앞의 홈리스를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우는’ 방법이 주로 사용된다. 2011년에 서울역 노숙인들에게 퇴거 조치를 내렸던 것처럼.
하지만 홈리스들을 피하거나 쫓아버려도, 어딘가에 여전히 홈리스는 존재할 것이다. 누군가 홈리스 상태에 놓인 건 그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홈리스였던 것은 아니다. 홈리스들의 가정환경, 직업군, 주거형태, 학력을 보면, 그들이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기회를 받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거리노숙인 중 18세까지 양친이 모두 사망하거나 부모 한명이 사망한 경우는 40%, 부모가 가출하거나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경우는 9%, 보육원에서 양육된 경우가 8%에 이른다. 18세 이하의 나이에 최초로 취업한 경우가 50%, 심지어 14세 이하에 취업했던 경우가 17%이다. 이들이 노숙 이전에 종사한 직업은 자영업 9%, 주방 15%, 건설일용 기능직 11%, 사무관리 2% 등 비교적 기능을 필요로 하는 직종이 37%인 반면, 나머지 63%는 저임금 노동(일용잡부, 주방보조, 머슴, 경비, 판매서비스 등)이었다. 노숙 이전의 주거형태는 자가와 전월세를 제외한 불안정한 주거생활을 한 경우가 40%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들의 학력은 평균 8.0년이며, 무학자가 2%, 초졸 이하가 28%, 중졸이하가 23%, 고졸이하가 32%로 나타났다. 홈리스 대책을 마련함에 있어서 ‘홈리스 상태’라는 현상만 볼 게 아니라, 홈리스 상태에 놓이게 된 배경과 원인을 고려할 필요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제는 이웃의 문제로 함께 고민하자
어제까지 홈리스가 있던 길거리에 오늘 홈리스가 보이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대신에, 이제는 이웃의 문제로 함께 고민하자. 우선 ‘홈리스’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홈리스를 게으른 낙오자로 보지 않기. 사회 안전망에 뚫린 ‘구멍’으로 떨어진, 사회의 취약성에 희생된 사람들로 정의하기. 그것이 홈리스를 혐오하는 사회 속에서, 홈리스를 혐오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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